항목 ID | GC0740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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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鸞祥 |
영어공식명칭 | Kim Nan-sang |
이칭/별칭 | 계응(季應),병산(缾山),매양(梅陽),운계(雲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환 |
출생 시기/일시 | 1507년 - 김난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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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28년 - 김난상 생원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37년 - 김난상 식년시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김난상 사간원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45년 - 김난상 을사사화로 파직 및 영천 병산 은거 |
활동 시기/일시 | 1547년 - 김난상 남해도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김난상 단양 이배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김난상 성균관직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8년 - 김난상 사헌부집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김난상 이조참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0년 - 김난상 사간원대사간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70년 - 김난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86년 - 김난상 오산서원 제향 |
추모 시기/일시 | 1973년 - 김난상 신도비 건립 |
출생지 | 김난상 출생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
거주|이주지 | 김난상 은거지 - 경상북도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
유배|이배지 | 김난상 유배지 - 경상남도 남해군 |
유배|이배지 | 김난상 유배지 - 충청북도 단양군 |
묘소|단소 | 김난상 묘소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사당|배향지 | 오산서원 -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청도(淸道) |
대표 관직 | 사간원정언|홍문관응교|사간원대사간 |
[정의]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 거주한 문신.
[개설]
김난상(金鸞祥)[1507~1570]은 사간원정언·홍문관응교·사간원대사간 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파직당하였으며,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가계]
김난상의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매양(梅陽)·운계(雲溪)이다. 아버지는 강예원습독관을 지낸 김현(金俔), 어머니는 생원 전윤서(全允序)의 딸 의인 안동전씨(安東全氏), 할아버지는 선공감정을 지낸 김영우(金靈雨), 증조할아버지는 호군을 지낸 김유손(金裕孫)이며, 부인은 진사 금원정(琴元貞)의 딸 증 정부인 봉화금씨(奉化琴氏)이다.
김난상의 후손이 본격적으로 영주에 정착하게 된 시기는 손자 김효선(金孝先) 대부터이다. 김효선이 처음 현 영주시 휴천동 일대로 내려왔고, 김효선의 손자 김광헌(金光憲)이 현 영주시 가흥동으로 이주하게 되면서, 영주시 가흥동 한절 일대에 지금까지 청도김씨 일문이 세거해 오고 있다.
[활동 사항]
김난상은 1507년(중종 2) 한양 반송방 도제동(道濟洞)[지금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큰형 김봉상(金鳳祥)[1496~1545]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28년 생원시에 둘째 형 김귀상(金龜祥)과 함께 급제하였는데, 이황(李滉)[1501~1570]과 동방(同榜)이다. 1537년에는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45년(인종 1)에는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1545년(명종 즉위) 인종이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으며, 이때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尹元衡)[1503~1565] 세력이 문정왕후의 밀지를 바탕으로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윤원형 일파는 양사(兩司)의 관원이었던 김난상 등을 불러 정적인 윤임(尹任)[1487~1545] 세력을 공격하려 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았다. 김난상은 윤원형 일파의 부름이 있자 “지금 임금이 어리시고 나라가 불안한데 간사한 자들의 말로써 대신을 논핵할 수 없다”라는 말로 거부하였고, 동료들과 부당함을 항의하다 파직당하였다.
김난상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장인의 별서(別墅)가 있는 영천군(榮川郡) 병산(缾山)[지금의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에 은거하였다. 이곳에서 김난상은 예안현 계상(溪上)[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던 이황을 찾아가 도의(道義)를 강마하기도 했으나, 1547년 9월 양재역벽서사건이 발생하면서 남해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 있는 동안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찾아온 유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판의금부사 김명윤(金明胤)[1493~1572]이 을사사화 때 억울하게 연루된 인사들의 사면을 청원하였다. 이에 김난상은 참작이 헤아려져 1566년 충청도 단양으로 이배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이황이 단양으로 찾아와 김난상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1567년 선조는 김난상의 직첩을 환급하고 서용한다는 명을 내렸다. 얼마 후 영의정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계를 올려 을사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을 방환시켜 주기를 청원하였는데, 이때 김난상에 대해서는 “학문이 순수하게 구비되어 있어 경연에 대비할 만하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곧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다.
김난상은 1568년(선조 2) 성균관사예에 제수되었는데, 이에 앞서 주강(晝講)에서 기대승(奇大升)[1527~1572]은 김난상처럼 20년 넘게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학문을 폐하지 않은 사람은 순서를 따지지 않고 중용할 것을 청하였다. 1568년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으며, 1570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올랐다. 이 무렵 김난상은 심의겸(沈義謙)[1535~1587] 편에 있던 박점(朴漸)[1532~?]이 정언의 자리에 오르자, 박점의 잘못을 거론하며 탄핵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간관들이 호응하지 않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0년 교동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난상의 문집으로 3권 2책의 『병산집(缾山集)』이 전한다.
[묘소]
김난상의 묘소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교동도 화개산 대우동(大牛洞)에 있었으나, 후손들이 영주에 정착함에 따라 1891년(고종 28) 현 영주시 가흥동 한절의 동구산(東龜山)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김난상은 1786년(정조 10) 오산서원(梧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오산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된 후 지금까지 복설되지 않았다. 김난상은 1828년(순조 28) 사림들의 청원으로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제학에 증직되었다. 1882년(고종 19) 김난상이 한양에 거주할 때 머물렀던 매양정(梅陽亭)을 영주로 옮겨왔고, 1944년 다시 현재 위치인 영주시 가흥동에 고쳐 세웠다. 1973년에는 매양정 앞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