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10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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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石同-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시지은 |
[정의]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의 자연마을인 둔터골에서 모내기와 김매기 때 활동했던 공동 노동 조직.
[개설]
시흥 지역의 논은 크게 방죽논과 물논으로 나눌 수 있다. 방죽논은 바닷가의 방죽을 막아서 물을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논이며, 물논은 빗물에 의지한 천수답(天水畓)을 말한다. 방죽논은 주로 은행동, 미산동, 광석동, 도창동, 매화동, 하상동 등의 호조벌 일대와 장현동, 광석동, 장곡동, 하중동 등의 장현천 일대 그리고 방산동과 죽율동 등에 있었다. 물논은 그 외 과림동, 군자동, 금이동, 논곡동, 물왕동 등에서 경작되었다.
광석동에는 나븐들과 둔터골 두 개의 자연 마을이 있었다. 나븐들은 범배산 동편에 있으면서 호조벌 일대에 속하고, 둔터골은 범배산 서편에 있으며 장현천 일대에 속했다. 방죽논은 물을 저수해서 모내기를 했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지 않으면 보통 하지(夏至) 즈음이면 모를 내고 순차적으로 김을 맸다. 둔터골의 논은 방죽논이었으므로 모내기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시흥 지역에서 모내기는 주로 개별 노동 교환 형식인 품앗이로 진행하고, 김매기는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로 진행하였다. 마을에 따라 모내기와 김매기를 모두 품앗이로 하는 경우도 있고, 모두 두레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석동 둔터골은 모내기와 김매기를 모두 두레로 진행했던 마을이다.
[구성]
광석동 둔터골 두레는 모내기 전에 두레를 꾸미고 이때 품값을 정한다. 두레 품값은 해마다 다르지만, 두레꾼을 많이 모으기 위해 일반 품값보다 조금 비싸게 정한다. 두레패에는 일종의 서열이 있었는데,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이 '영좌(靈坐)', 그 다음 나이가 많은 사람은 '이좌(二座)', 제일 나이가 어린 사람은 '조사'라고 불렀다.
모내기를 할 때는 지게에 모를 지고 다녀야 해서 풍물 악기를 칠 수 없지만, 김매기를 할 때는 꽹과리·징·장구·북·소고·호적과 같은 악기를 쳤다. 두레기(--旗)는 깃대 위에 꿩장목을 달고 그 밑에 태극기를 단 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글씨가 적힌 깃발로, 워낙 커서 두레기를 드는 사람은 기운이 세야 했다. 김매기를 할 때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장구를 치며 선소리를 주면 나머지 사람들이 춤을 추며 소리를 받기도 한다.
두레패의 식사는 미리 정한 순서에 따라 두레패 회원들 집에서 담당하였다. 매일 아침, 아침새, 점심, 저녁새, 저녁으로 다섯 번이지만, 부잣집에서는 저녁새와 저녁 사이에 '살랑새'라고 해서 술과 간단한 안주를 대접하기도 했다. 두레패의 작업량은 보통 하루에 50마지기[지방마다 다르나 논은 약 150~300평, 밭은 약 100평 정도]였으며, 매일 저녁 식사를 할 때 다음 날 작업량을 정하였다.
[내용]
둔터골 앞의 방죽논은 둔터골 외 인근의 여러 마을에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다른 마을의 두레를 만나는 일이 잦았다. 그중 하중동 샛말, 장현동 새재, 장곡동 긴마루와 맷골, 능곡동 삼거리, 군자동 산뒤마을 두레 등과 마주치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마을의 두레가 자기 마을 논을 지나가도록 허락하는 신호로 방구[북처럼 생긴 농악기의 하나]를 치는데, 이를 '종구댄다'고 한다. 이 법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두레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두레 싸움은 상대 마을 두레기에서 꿩장목을 빼앗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이 나는데, 광석동 둔터골 두레는 다른 마을 두레에게 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김매기가 모두 끝나고 두레 품값을 계산하는 것을 '심본다'라고 한다. 기준으로 정한 것보다 농토가 많은 사람은 품값을 더 내고, 적은 사람은 품값을 받아가는 식이다. 품값을 다 계산하고 나면 하루 날을 잡아서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는 것을 '두레 파작'이라 한다. 이 두레 파작은 시흥 지역에서는 일반적이었으며, 둔터골에서는 하중동 샛말 두레와 장현동 새재 두레 등 이웃 마을 두레를 초청해서 함께 놀기도 하였는데, 이럴 경우 다른 마을 두레와 함께 풍물 악기를 치며 어울렸다.
[현황]
시흥 지역에서의 두레는 6.25전쟁 후나 새마을운동 무렵에 사라졌다. 광석동 둔터골 두레 역시 농업의 기계화와 도시화로 인한 공동체 해체로 1975년경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