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27 |
---|---|
한자 | 成世章墓 |
영어공식명칭 | Tomb of Seong Sej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미산동 산30-6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권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506년 - 성세장 출생 |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583년 - 성세장 사망 |
이장 시기/일시 | 1941년 - 성세장 묘 이장 |
개축 시기/일시 | 1990년 4월 15일 - 성세장 묘 정비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미산동 산30-1 |
원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 |
성격 | 묘소 |
관련 인물 | 성완|성희문|성희적|성낙|김안국|이기|윤원형|김귀영 |
관리자 | 성일제 |
[정의]
경기도 시흥시 미산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성세장의 묘.
[개설]
성세장(成世章)[1506~1583]의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중회(仲晦)·경회(景晦), 호는 사암(思庵)이다. 현풍현감 성희문(成希文)의 아들이나 사헌부감찰 성희적(成希赤)에게 입양되었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로 식년(式年) 문과에 올라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도시정(司䆃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하여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대사헌,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내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벼슬 따위에 추천되어 관리로 뽑힘]되었으며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위치]
성세장 묘는 경기도 시흥시 미산동 산30-6에 있다. 재실(齋室) 인현재(仁峴齋) 우측 창녕 성씨(昌寧成氏) 세장지(世葬地) 할아버지 호조좌랑 성완(成玩) 묘의 우측 언덕에 넷째 큰아버지 사헌부감찰 성희적(成希赤) 묘, 둘째 큰아버지 홍문관교리 성희중(成希仲) 묘 아래에 위치한다. 그 우측 구릉에 성완의 현손(玄孫) 성여용(成汝容) 묘가 있다. 시흥시청에서 부천시 방향으로 국도39호선으로 가다가 시흥시 미산동 간댐마을을 지나 좌측으로 구수미1길로 들어서면 구시미마을 북측 산언저리에 있다.
[변천]
원래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에 있었는데, 1941년 문중에서 부천군 소래면 미산리 구시미[지금의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로 이장하였다. 1990년 4월 15일 묘역을 정비하면서 묘지석(墓地石)이 발굴되었다.
[형태]
묘역에는 옛 석물로 상석, 향로석, 복두공복(幞頭公服)의 높이 1.4m의 문인석 한 쌍이 세워져 있다. 좌측 문인석의 복두 위 왼쪽이 깨졌고, 우측 문인석은 복두 위가 깨진 것을 시멘트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새로 오석(烏石)으로 다듬은 높이 2m의 비석과 호석(護石)[둘레돌]을 하였다. 비석은 2단 방부(方趺)에 이수(螭首) 앞뒤로 쌍룡롱주(雙龍弄珠)로 장식하였다.
[금석문]
1990년 창녕 성씨 후손들이 묘비를 다시 세울 때 묘비 밑에서 청화백자를 네모나게 구워 만든 묘지석이 나왔다. 표제문(表題文)에 '유명조선국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겸 지의금부사 성공묘지명(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事成公墓誌銘)'이라고 썼고, 부인의 경우는 '정부인 안동 김씨묘지(貞夫人安東金氏墓誌)'라고 썼다. 지문 내용은 선대 가계 등과 명(銘)을 달았다. 1584년(선조 17) 제작했고, 지은이는 선조 재위 기간 우의정을 지낸 김귀영(金貴榮)이다. 새로 세운 비석에는 이황(李滉)의 문인 5촌 조카 성락(成洛)이 지은 행장(行狀)을 음기(陰記)하였다. 입석(立石)은 1990년 4월 15일이다.
[의의와 평가]
성세장 묘는 조선시대 인물의 행적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출토된 묘지명은 조선시대 분묘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