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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2562
한자 文學-智異山
영어음역 Munhak Sogui Jirisangwa Salmui Jirisan
영어의미역 Jirisan in Literature and Jirisan in Lif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복효근

[개설]

지리산은 거대한 면적과 높이를 자랑하는 물리적인 공간임과 동시에 정신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이다. 유·불·선 사상뿐만 아니라 각종 무속 신앙이 그 안에서 배태되었으며 수많은 설화를 품고 있다.

지리산이 품었던 사상, 신앙, 설화들은 문학에 수용되어 여러 장르로 표출되었고, 신화·전설·민담·소설·수필 등의 산문이나 여러 형태의 운문으로 나타났다. 또한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지리산 빨치산에 대한 기억은 이를 배경으로 하는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지리산은 문학적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지리산이 잉태하고 형상화한 작품들]

오래된 구전 설화 가운데 「아기장수 우투리」는 지리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설화는 영웅의 출현을 통해 부패한 세상의 개혁을 원하는 민중의 소망을 담은 이야기로 지리산이 변혁과 이상향의 공간으로 그려진 한 원형으로 볼 수 있다. 남명 조식의 시조에서도 지리산은 이상향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변혁을 바라며 이상향을 좇아 지리산에 그 이념을 구현하려 했던 청학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이미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영재우적(永才遇賊)이라 하여 지리산과 덕유산 중간의 육십령 통로에 기거하고 있던 도적 떼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시습『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은 중국의 전등 신화를 번안한 성격이 짙지만 남원의 만복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리산 만복대를 마주보고 있는 만복사를 배경으로 하고 주인공 양생이 지리산으로 종적을 감춘 것은 단순히 배경의 의미만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지리산과의 관련 속에서 형상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조선 중기 김종직·김일손·이륙지리산 기행문들은 모두 기행 수필 문학의 명작들로 평가된다.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은 사실적 산문 형식의 기술을 통해 지리산의 해동청(海東靑)을 잡는 모습을 비롯하여 몇몇 풍물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김일손의 기행문은 섬세한 필치와 수사적 표현 양식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표적인 고전 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春香傳)』『흥부전(興夫傳)』 그리고 「가루지기 타령」 등도 넓은 의미에서 지리산을 무대로 한 것들이다.

근대로 와서 지리산 문학을 살펴보면,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박경리의 『토지』도 악양면 평사리가 작품의 배경이다. 김동리는 『역마』에서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역마살이 낀 주인공의 떠돌이 생활을 그리고 있다.

빨치산 투쟁과 6·25 전후의 이념 투쟁은 지리산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뱀사골 마뜰마을을 배경으로 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과 『철쭉제』, 김주영의 『천둥소리』, 서정인의 『달궁』은 모두 지리산의 비극적 역사를 주제나 소재로 하고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한 빨치산 기록이라는 점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80년대 분단 문학의 대표작으로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여순 반란 사건에서부터 휴전 성립 시기까지 전라남도 지역과 지리산을 무대로 입산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형상화했다.

지리산은 3개의 도와 5개의 시군에 걸쳐 있어 지리산을 소재로 했거나 문학적 근거지로 삼은 작품은 수없이 많으나 여기서는 지리산의 남원 지역에 한정하여 대표적인 고대, 현대 문학 몇 작품을 소개하기로 한다.

[고전 문학 속의 지리산]

1.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가루지기 타령」

신재효(申在孝)가 개작한 판소리 6마당 가운데 하나에 「가루지기 타령」이 있다. 「변강쇠 타령」 또는 한역하여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한다. ‘가루지기’란 서민이 죽으면 시체를 거적으로 말아 지고 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송장이라는 뜻이다. 「가루지기 타령」은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던 변강쇠가 장승을 패어 때다가 동티가 나서 가루지기 신세로 저승길로 가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외모는 아름다우나 사주에 상부살이 박혀 남편과 뭇 남정네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여 30리 안에 15살 이상 남정네의 씨를 말리게 한 천하의 음녀인 서도의 계집 옹녀(雍女)가 동네에서 쫓겨나 ‘남남(南男)’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간다. 한편 변강쇠는 남도(南道)에 살면서 원래 빌어먹었고, 우물에 똥을 누거나 임신한 부인의 배를 차거나 호박에 말뚝을 박는 등의 몹쓸 짓만 골라하던 잡놈으로 동네에서 쫓겨나 ‘북녀(北女)’를 찾아 북쪽으로 간다.

변강쇠는 개성 서북의 청석동이라는 골짜기에서 혼자 지나가는 옹녀를 보자 수작을 걸어 바위 위에서 세 번씩이나 일을 벌인다. 그리하여 곧장 옹녀와 함께 살게 된 변강쇠는 일은 하지 않고 밤이나 낮이나 그 짓만 한다. 그는 뭇 사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옹녀의 음기를 충족시켜주기는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들을 쫓아내고 만다. 그래서 옹녀와 변강쇠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옮겨가는 곳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에 들어가 살면서 변강쇠는 옹녀의 성화에 못 이겨 태어난 뒤 처음으로 나무를 하러 간다. 하지만 그는 실컷 낮잠만 자고 별이 총총한 밤에 일어나 죄 없는 장승을 빼어가지고 와서는 도끼로 쪼개어 불을 지피게 된다. 이에 8도의 장승들이 변강쇠를 징치하게 이른다. 변강쇠는 49일 동안 장승들의 문초에 시달리며 동티가 나서 앓다가 장승처럼 뻣뻣이 선 채로 죽게 된다.

변강쇠는 죽어가면서 옹녀에게 “열 살 전 아이라도 명색이 사나이란 것이 자네 몸에 손을 대거나 집 근처에 얼씬하면 즉각 급살할 것이다.”라고 협박 어린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옹녀는 타고난 호색을 참을 수 없는 데다 험악한 송장을 치우려고 치상만 해주면 같이 살겠다고 남자들을 유혹한다. 그러자 중·초라니·풍각쟁이들이 서로 덤벼들다가 줄줄이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각설이패, 마종꾼들이 송장 여덟을 나누어 가로 지고 북망산으로 찾아가게 된다.

왕성한 정력의 상징으로만 알려진 변강쇠와 옹녀, 우리 고전에서 보기 드물게 남녀간의 음양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가루지기 타령」은 실제로는 하층민들의 삶과 사회 개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에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남원시는 그 의미를 기려 지리산에 흘러든 변강쇠와 옹녀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남아 있는 지리산 백장계곡에 「가루지기 타령」을 형상화한 백장공원을 조성하였다. 백장계곡은 변강쇠와 옹녀가 놀았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옹녀탕과 변강쇠가 기력을 보충했다는 득독골 등 설화 속의 무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남녀 성기 모양을 빼닮은 음양바위가 있고, 바위를 긁어 낸 가루를 먹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근원바위, 아기를 태어나게 한다는 수태바위 등이 있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를 중심으로 한 지리산 주변이 「변강쇠 타령」의 발상지라는 확신 하에 남원문화원은 1998년 백장계곡에 변강쇠·옹녀 쌈지공원을 조성했다. 장승을 장작으로 태운 변강쇠에게 보복하기 위해 8도의 장승들이 모여 회의를 한 곳이라는 것이다. “변강쇠 타령과 관련된 지명과 전설이 남아 있어 이곳에서 우주의 질서인 음양의 조화와 인간 평등사상이 전파되었음을 알게 해준다.”고 하여 8도의 장승을 비롯한 조각 작품들을 조성하여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2. 해학과 풍자의 『흥부전』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어름에 연생원의 두 아들이 살고 있었다. 같은 어미의 소생이었지만, 형 놀부는 심술이 사납고 둘도 없는 악한 사람이었고, 아우 흥부는 동기간의 우애가 독실한 천하에 둘도 없는 착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동생과 같이 살아오던 형 놀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전답과 재산을 흥부에게는 밭 한 마지기, 돈 한 푼도 주지 않고 흥부를 쫓아낸다. 흥부 가족은 언덕 위에 움집을 초라하게 짓고 들어앉았으나 앞으로 살 길이 아득하였다. 게다가 아이들은 해마다 자꾸만 늘어났고, 품팔이를 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흥부가 견디지 못하여 형의 집으로 쌀을 얻으러 간다. 그러나 악한 형 내외에게 죽도록 매만 얻어맞고 온갖 욕설과 구박만 당하고 돌아온다. 또 하루는 읍내에 나갔다가 이방한테서 김부자가 죄를 지어 형벌로 볼기 30대를 맞게 되었는데, 대신 볼기를 맞는 사람에게 30냥을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흥부는 김부자 대신에 볼기를 맞으려고 관가로 가나 그도 못하게 된다.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왔다. 강남에서 제비들이 돌아와 집을 짓는다. 흥부 집 처마에도 제비가 집을 짓고 새끼를 키우고 있다. 하루는 뱀이 제비집에 들어가 새끼를 잡아먹으려고 하므로, 흥부가 불쌍히 여겨 뱀을 칼로 치려할 때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다. 흥부가 당사실로 동여주니 제비 새끼는 죽지 않고 살아난다.

그 제비가 강남으로 갔다가 제비 왕에게 사실을 고하고, 흥부의 은혜를 갚아 달라고 부탁한다. 제비 왕은 그 제비에게 박씨 하나를 주며 흥부에게 가져다주라고 한다. 이듬해 봄에 그 제비가 흥부의 집에 와서 박씨 하나를 뜰에 떨어뜨려 준다. 흥부는 그 박씨를 심었고, 가을이 되어 커다란 박이 많이 여문다. 흥부 내외가 먹으려고 박을 하나씩 타 보니, 선약을 비롯하여 수많은 재물과 선녀들이 쏟아져 나온다. 흥부는 일시에 부자가 되고, 많은 애첩과 시종들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놀부는 아우 흥부가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시기와 질투가 나서 이것저것 빈정대다가 흥부에게 부자가 된 이유를 묻는다. 아우의 내력을 들은 놀부는 이듬해 봄에 제비 새끼를 일부러 잡아서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실로 동여 주었다.

제비는 이듬해 박씨 하나를 가져다 주었고 놀부는 그 박씨를 심고 가을이 되기를 고대한다. 가을이 되어 많은 박이 익었다. 하인을 시켜 박을 타게 하니, 첫째 박에서는 여러 동자가 나와서 놀부를 골리며 3천 냥을 뺏아간다. 둘째 박에서는 노승들이 여러 상좌를 데리고 나와 5천 냥을 빼앗아 간다. 세 번째 박에서는 상여꾼이 나와서 또 3천 냥을 빼앗아 간다.

넷째 박에서는 무당들이 나와서 5천 냥을 빼앗아 간다. 마지막 박을 타보니 누런 똥이 쏟아져 나와 놀부의 집은 똥 바다가 된다. 아우 흥부는 형이 패가망신했다는 소문을 듣고 형 내외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지성으로 섬기며, 자기 집과 똑같은 집을 지어 주어서 살게 한다. 그렇게 악독한 놀부도 개과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 형제가 화목하게 산다.

『흥부전』은 작자와 연대 미상의 판소리계 소설로, 설화와 판소리 등의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다. ‘연의각’ ‘흥부가’ ‘박흥부전’ ‘박타령’ 등으로 불려질 만큼 이본도 많고 제목도 다양하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서민 사회에서 광대와 가객 등 예능인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소설에 나타난 대중적이며 통속적인 권선징악이 아주 자연스럽게 해학과 풍자적인 표현을 통해서 독자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아우 흥부가 형 놀부의 집에서 쫓겨나오는 장면, 흥부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많은 아이들과 가난하게 사는 장면, 흥부가 형의 집에 양식을 얻으러 갔다가 매를 맞고 오는 장면, 흥부가 제비의 다리를 고쳐 주고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되는 장면, 형 놀부가 아우의 말을 듣고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다가 고쳐 주고 패가망신하는 장면이 너무도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흥부전』은 어떻게 보면 동화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한 감이 있으나, 그러한 결함을 해학적이며 풍자적으로 잘 극복하고 있다. 거기에다 유교 윤리사상의 하나인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흥부전』은 선악의 극치를 달리는 형제간의 상반된 인간성을 해학적이면서도 풍자적으로 표현하여 문학적인 가치를 높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흥부전』은 윤리 소설로서 인과응보라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인간 계도 사상을 지닌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금까지 『흥부전』은 하나의 이야기로만 알려져 왔으나 남원 지방의 설화를 고증해 본 결과 흥부와 놀부는 실제 인물로 밝혀졌다. 『흥부전』의 작자나 저작 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남원 지방에서는 오래전부터 「흥부전」과 같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형인 박첨지는 부자임에도 인색하였고, 동생인 춘보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다 부자가 되어 이웃에 많은 선덕을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흥부가」의 ‘제비노정기’와 ‘박타령’ 등에 나오는 지명들을 근거로 하여 1992년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의 고증을 통해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와 놀부의 출생지로(박첨지 설화), 아영면 성리마을은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곳으로(춘보 설화) 알려졌다. 지금도 두 마을에서는 삼월 삼짓날 박첨지의 제사와 정월대보름날 춘보망제를 지내고 있다. 흥부마을엔 흥부소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흥부의 뜻을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인월면 성산리아영면 성리가 흥부전의 발상지로 고증되면서 1993년부터 남원시에서는 흥부제를 열고 있다. 흥부의 착한 마음씨와 형제애를 본받기 위해 매년 제비가 강남으로 떠나는 날인 음력 9월 9일에 열리며, 『흥부전』에 나오는 주요 소재를 근거로 5개 분야 27개 종목에 걸쳐 펼쳐진다. 전야제를 시작으로 창무극 흥부전, 길놀이, 화초장 메고 다리기, 흥부 놀부 부인 줄다리기, 사랑의 흥부 가족 잇기, 흥부 박타기 등 다채롭고 흥미로운 축제 한마당이 펼쳐진다.

3.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 「춘향전」

몽룡이 글공부를 하다가 잠시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방자를 시켜 춘향을 데려오게 하지만, 춘향은 응하지 않는다. 몽룡은 그 날로 춘향의 집으로 찾아가 월매에게 춘향과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맹세하고 춘향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원부사였던 아버지가 상경하게 되면서 몽룡도 함께 상경하게 된다. 새로 부임한 변사또는 만사 제쳐두고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 모아 연일 잔치를 벌이는데, 그 와중에 예쁘기로 소문난 춘향도 불려가게 된다. 변사또는 춘향이 기생의 딸이므로 춘향 또한 기생이나 마찬가지이니 수청을 들라고 한다. 그러나 춘향은 수청을 들 수 없다고 거절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화가 난 변사또가 춘향을 자신의 생일날 처벌하겠다고 한다.

한편, 한양으로 간 몽룡은 장원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다시 남원에 내려오게 된다. 몽룡은 변사또의 횡포와 춘향이 겪은 일들을 모두 듣게 되지만 거렁뱅이 행세를 하며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한다. 춘향은 그런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여전히 변치 않는 사랑을 보여주며 월매에게 그를 극진히 대접해주라고 부탁한다.

드디어 변사또의 생일 잔칫날, 남루한 행색을 한 몽룡이 들어와 자신이 시를 한 수 지을 테니 술 한 잔만 대접해 달라고 하며 변사또가 민중을 핍박하는 것을 꼬집는 시를 지어낸다. 변사또는 그 시를 보고도 몽룡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춘향을 불러내라 명령하고, 곧 암행어사 이몽룡이 출두한다.

변학도와 그 무리들은 포박당하고 춘향은 처음에는 어사인 몽룡을 알아보지 못하고 절개를 시험하는 어사에게 다시 수청 들기를 거절한다. 그러나 곧 어사가 된 이몽룡을 알아보게 되고 둘은 기쁘게 재회하게 된다. 춘향은 굳은 절개로 인해 칭송받고 이몽룡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다.

모든 문학 작품이 그렇듯이 「춘향전」 역시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작자와 연대 모두 미상이지만, 「춘향전」은 전 백성의 합작품으로 추측된다. 어느 시대에든 불가능했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을 그린 점이나, 백성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던 탐관오리가 통쾌하게 처벌당하는 모습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힘없는 민중들은 문학 작품을 통해 자신들이 꿈꾸는 것들을 대리만족했을 것이다.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굳은 절개를 지키는 성춘향의 모습은 당시에 당연시되거나 혹은 권장되었던 윤리관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춘향의 정신을 계승하고 고전의 문화적 계승을 위하여 매년 5월 4일~5월 8일(양력)에 걸쳐 광한루원 등 남원 시내 일원에서 춘향문화선양회의 주관으로 춘향제전 행사를 벌인다. 이 행사에서는 춘향제향, 전국춘향선발대회, 춘향국악대전, 씨름대회, 그네뛰기, 전국궁도대회, 시조경창대회 등이 성대하게 벌어진다.

4. 죽음을 초월한 사랑, 『만복사저포기』

전라도 남원에 양생(梁生)이라는 노총각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만복사라는 절에서 방 한칸을 얻어 외롭게 살고 있었다. 젊은 남녀가 절에 와서 소원을 비는 날 그는 모두가 돌아간 뒤 법당에 들어갔다. 저포를 던져 자신이 지면 부처님을 위해 법연(法筵)을 열고, 부처님이 지면 자신에게 좋은 배필을 달라고 소원을 빈 다음 공정하게 저포놀이를 했는데 양생이 이기게 되었다.

양생이 탁자 밑에 숨어 기다리고 있자 15~16세 정도 되는 아름다운 처녀가 외로운 신세를 한탄하며 배필을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축원문을 읽은 다음 울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양생은 탁자 밑에서 나가 처녀와 가연을 맺은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얼마 뒤 양생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딸의 대상을 치르러 가는 양반집 행차를 만나 자신이 3년 전에 죽은 그 집 딸과 인연을 맺었음을 알게 되었다. 양생은 처녀의 부모가 차려 놓은 음식을 혼령과 함께 먹고 난 뒤 홀로 돌아왔다. 어느 날 밤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 자신은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니 양생도 불도를 닦아 윤회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양생은 처녀를 그리워하며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혼자 살았다.

시공(時空)을 초월한 사랑, 죽음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한문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가진다. 이 작품은 ‘양계와 음계의 인물의 만남-이별-양계의 인물이 속세를 버림’이라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주인공 양생은 비록 현실이 아닌 음계의 인물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지만 그것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한다.

음계의 여인이 사흘 동안의 재가 끝난 후 공중에 나타나 양생에게 정업을 닦아 속세의 누를 벗어날 것을 부탁하지만, 양생이 장가도 들지 않고 속세를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이 작품은 설화적 소재에 자신의 창의성을 덧붙여 상당 수준의 소설적 형식을 갖춤으로써 소설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만복사저포기』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주적인 성격을 보여 준다. 그리고 산 남자와 죽은 여자의 사랑을 통해 강렬한 삶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죽은 여자는 민간 속신에 나타나는 문자 그대로의 귀신이 아니다. 그것은 역설적인 구조를 마련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작자의 논설에 나타난 사상과 일치한다.

『만복사저포기』의 생인(生人)과 사자(死者)의 사랑은 살아 있는 남녀 간의 사랑보다 더욱 강렬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 의지를 좌절시키려 드는 세계의 횡포를 고발하는 데 더욱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작품의 결말은 비극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도교적인 초월로 보기도 한다. 현실적·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현실을 깊이 있게 주시하면서 현실이 지닌 문제점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주의적, 사실주의적 경향을 띤다.

달빛 은은한 밤이면 양생을 만날 것도 같은 만복사남원시 왕정동에 있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 때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절터를 보면 한때 꽤 크고 웅장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 문학 속의 지리산]

1.『달궁』

『달궁』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다. 인실이라는 여인의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가 주인공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3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모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여러 인물들의 삶이 독립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렇다고 30여 명에 이르는 등장 인물들이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독자들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익명성이 강한, 우리 시대의 평범한 장삼이사일 뿐이다.

『달궁』은 전통적인 소설 구성 방식과는 다르다. 비록 인실이라는 한 여인의 삶과 직·간접으로 닿아 있기는 하지만, 86개의 에피소드들은 30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의 독립된 삶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달궁’은 지리산 속의 지명이다. 소설 『달궁』은 그 달궁에서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인실이란 여자가 세상으로 내려와 헤매는 이야기가 많은 삽화들과 뒤얽혀 있다.

무식한 중년 여자의 삶은 쫓겨난 자의 삶이지만, 세상의 부조리, 우스꽝스러움, 뒤틀림과 맞서 있는 힘센 모습이다. 교육이나 제도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은 그 무식한 여자의 ‘싱싱한’ 시각을 통해서 당연한 것으로 행세하는 많은 것들이 결코 당연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소설의 내용 중 일부분이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은 여러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인실이의 삶에 관련된 많은 등장 인물들의 삶을 인실이의 삶에 종속시키지 않고 각각 독립시켜, 그리고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펼쳐 보인다. 따라서 『달궁』의 줄거리 요약은 불가능하다. 줄거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줄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실례로, 소설의 서두에 ‘네거리’란 제목 아래 한 여자의 죽음이 나온다. 그러나 곧 이어 ‘모래밭’이란 제목으로 두 처녀를 태워주는 운전사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등장가’에서는 어느 여자의 넋두리가 나온다. 차에 탔던 두 처녀의 이야기가 ‘만리포’란 제목 속에, ‘다시 네거리’란 제목 아래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순경과 이 길을 지나가다 호기심을 보이는 운전사의 대화가 나온다.

독자들은 한참 후에야 운전사는 지방 검사이고 그 검사는 두 처녀가 타기 전에 또 다른 여인을 자신의 승용차에 태워 주었으며, 그 여인은 횟집 여자이며 여인이 죽기 전날 밤에 검사가 그 횟집에 들렀고, 검사는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갔는데 죽은 여자가 자신이 태워다 준 여인임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운전사, 즉 검사를 비롯한 두 처녀가 인실의 생애에 종속적으로 얽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에피소드가 계속될수록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독립된 줄거리를 형성한다.

2. 빨치산의 처절한 삶을 그린 『남부군』

6·25전쟁 중 남한 빨치산을 대표하던 ‘남부군’을 주제로 한 체험적 수기로 소설 속 무대가 주로 지리산이다. 지은이 이태는 1922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국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과 『합동통신』 기자를 지냈다.

1950년 9월 20일, 군산 앞 바다 오식도에 연합군이 상륙하면서 전주지사 기자들은 전북도당 간부들을 따라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무명골짜기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 대원이 되었으며, 회문산 독수리 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되어 17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1952년 부대에서 낙오된 후 지리산 기슭 덕산에서 체포되었고, 수감 생활 등으로 고된 삶을 살다가 정해영 의원을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6대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1988년 펴낸 소설 『남부군』은 그동안 금기시되던 빨치산을 역사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은 첫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 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남부군은 다시 중산리골로 이동한 후 천왕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토벌군이 배치되지 않은 간격을 찾아 대피하는 것이다. 천왕봉과 반야봉, 그리고 칠선골, 백무골 등 험하고 응달진 북벽 골짜기는 그 겨우내 토벌군 초소가 별로 배치되지 않던 ‘구멍’이었다.

눈이 깊고 바람이 세어 겨울철엔 짐승조차 찾지 않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곳은 항상 빨치산이 즐겨 찾는 은신처가 되었던 것이다. 중산리 등반구에서 정상까지 9㎞, 가파르고 지루한 산길이 계속되고 법계사부터는 눈에 덮인 바위벽도 있었지만 기동사단은 눈길을 헤치며 단 몇 시간 만에 청왕봉 정상에 올랐다.”

『남부군』에 나오는 대목이다. 처절했던 빨치산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태는 후일 지리산을 찾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지리산의 산세가 이토록 복잡하지만 빨치산 제2병단의 대원들은 자기 집 마당처럼 지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신출귀몰하는 그 기동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 자신도 그럭저럭 지리산의 어느 산굽이 발 들여놓지 않은 곳이 없지만, 원래 산이나 골짜기는 들어서는 길목이나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수가 있어 일단 산속에 파묻혀 버리면 흔히 다니는 루트 외에는 어디가 어딘지 막막할 때가 많았다. 대개가 밤길인데다가 길로만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태는 자신이 『남부군』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기록에서 나는 냉혹한 자가 숙청 등 빨치산 사회 내부의 모습을 목격한 그대로 적어봤다. 몇 만 년을 진화해온 인간의 문명이, 몇 십 년을 길러온 인간의 양식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지고, 벗겨지며, 원시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이 기록에서 나는 극한 상황에 즈음한 인간의 가식 없는 심정을, 어쩌다 이 죽음의 대열에 뛰어든 젊은 지성들의 고뇌를, 그리고 빨치산도 인간이기에 피할 수 없었던 시(詩)와 낭만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은 주의 사상은 물론 전쟁 그 자체와도 아무 상관없는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들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호철은 “이 수기는 이때까지 내가 읽은 이런 종류의 수기나 소설들을 통틀어 가장 역사의 현장에 가까이 닿아 있다. 가령 장면 하나하나의 분위기, 인물들의 대화, 빨치산 용어들, 서슬 선 칼날 위를 걷는 듯한 하루하루의 생활, 극단적인 정황 속의 남녀 관계와 그 애환의 농도 등등, 그것은 그 생활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면 도저히 상상만으로는 써낼 수 없는 것들이다.”이라며 소설 속 생생한 장면들을 칭찬했다.

3. 지리산 작가 이병주의 『지리산』

이병주의 대표적 장편 소설 『지리산』은 분단의 역사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뼈아픈 시련을 가장 잘 그리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이다. 그 자신이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나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한 소설인 『지리산』은 가장 격동기였던 일제 말기에서부터 민족 해방, 6·25 동란을 거쳐 휴전 협정이 이루어지기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 격동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몰락 지주의 집안 출신인 주인공 이규는 천재 소리를 듣는 박태영과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며 중학 시절을 보낸다. 자신의 먼 친척뻘 되는 하영근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40년 창씨개명의 조치가 내려지게 되고, 이규는 일본 경도로 건너가 상고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일본 처녀 세스꼬와 연애를 하는 한편, 박두경이란 학생을 만나 민족혼을 생각하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미일 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제가 실시되고 공산주의자가 된 박태영은 이를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해방이 되자 박태영은 H군 인민위원회 간부가 된 선배 하준규를 돕는다. 그리고 이규는 하영근의 딸 윤희와 결혼하는 한편 프랑스로 유학길에 오른다.

한편, 박태영은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좌익으로 활동하지만 여수·순천 반란 사건을 보고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1950년 4월, 박태영은 노동식의 동창생인 문남석 형사에게 붙잡혀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다. 6·25가 터져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박태영은 집에 돌아와 김숙자와 결혼을 한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박태영은 숙자를 남겨두고 빨치산이 된다. 그리고 1951년 6월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의 승리 사단으로 전속된다. 공비 소탕 작전이 전개되고 빨치산 부대는 점점 세력이 약화되고, 박태영은 보급 투쟁 중 이규의 사촌 동생으로부터 토벌대 대대장으로 있는 옛 친구 주영중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산으로 올라가 버린다.

휴전 협정이 조인되자 남부군은 경남도당으로 이동하지만, 경찰에 의해 중요 간부가 몰살되고 박태영은 남은 대원들의 지휘자가 된다. 박태영 일행은 빨치산이 전멸하게 된 뒤에도 대원 전부를 자수시키고, 정복희·순희 등과 함께 산에 남았다가 경찰에 포위돼 사살되고 순이 역시 전향을 거부하다 사형된다.

이 소설의 배경 무대는 지리산이다. 소설 속에 이들이 속했던 빨치산 부대 남부군은 하동읍, 구례읍, 화개 장터, 곡성, 운봉지리산 주변을 거의 돌다시피 하는데, 이들은 악양 전투 실패 후 지리산의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된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을 만한 빨치산의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 바로 의신 빗점골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빗점골 회의에서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은 빗점골의 너덜지대로 알려지고 있다. 이 너덜지대는 ‘합수내 흐른바위’라고도 하는데 지리산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빗점골이 다시 절터골과 산태골을 빚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현지 주민들은 의신마을 상단부 계곡에서부터를 빗점골로 부르고 있는데 일부는 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으로 부른다. 의신에서 삼정까지는 3㎞ 남짓한 거리로 비포장도로변으로 좁은 계곡이 이어진다.

소설 『지리산』의 등장 인물 20여 명은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념보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움이 더 처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지리산은 이들의 처절했던 투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모습 그대로 우리들 곁에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의 처절했던 삶의 현장은 일부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참고문헌]
  • 최화수의 지리산 산책(http://www.ofof.net)
  • 재봉틀의 국어방(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0880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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