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5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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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Nobong Maeulgwa Honbul Munhakgwan |
영어의미역 | Nobong Village and Honbul Literary Hous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정섭 |
[개설]
최명희의 『혼불』은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인 1932년부터 1938년까지의 매안이씨 양반가의 이야기를 서술한 소설이다. 민속학의 보고, 모국어의 보고로 칭송받고 있으며, 특히 종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고 자연 환경을 세밀히 묘사하여 생태 문학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문학의 고장 남원]
노봉마을은 소설 『혼불』의 무대이다. 고전 문학의 고장인 남원은 현대 문학을 대변하는 『혼불』의 배경지, 즉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로 인해 다시 한 번 문학의 고장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혼불』은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산천 초목, 생활 습관, 사회 제도, 촌락 구조, 역사, 세시풍속, 관혼상제, 통과 의례, 그리고 주거의 형태와 복장, 음식, 가구, 그릇, 소리, 노래, 언어, 빛깔, 몸짓들을 단순한 토막 지식으로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행하고 치르고 감당했던 선조들의 숨결, 손길, 염원과 애증이 선연히 살아나도록 애절하게 재생해냈다.
이러한 것들은 민속학 사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발로 뛰면서 몸으로 느끼고 호흡한 결과로 나타난, 철저한 고증의 결과이다. 작가는 머리로, 생각으로 『혼불』을 쓴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마음으로, 가슴으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소설가 최명희는 『혼불』에서 일제강점기에 남원 매안마을에 쓰러져가는 종가의 3대에 걸친 종부들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이 작품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쓰여졌으며, 20세기 말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혼불』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과 애련함, 근엄함과 서러움, 밝음과 어둠은 댓바람 소리와 함께 대실을 건너 노봉마을과 사매면을 감싸고 돈다. 가장 꽃다움을 보여주는 꽃심을 지닌 땅 노봉의 이곳저곳에서, 또 울분의 꿈틀거림이 녹아 있는 거멍굴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우리는 『혼불』의 소살거림을 느낄 수 있다.
[노봉마을의 혼불문학관]
혼불문학관은 최명희의 뜻을 영원히 기리고, 『혼불』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아우름의 터전으로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에 위치해 있다. 혼불문학관 뒤편으로는 노적봉과 팔봉산이, 그 옆에는 청호저수지와 이름 모를 산이 올망졸망 에워싸고 있다.
혼불문학관 앞에는 노봉마을이 있다. 노봉마을은 치맛자락을 펼쳐놓은 것 같은 무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혼불문학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한 생애를 다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속삭임과 울부짖음이 지금도 최명희 작가의 손끝을 통하여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들 한다.
커다란 물레방아가 입구에서 맞이하는 혼불문학관은 생각보다 터가 꽤 넓고 규모도 크다. 돌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기와 지붕의 한옥 건물 두 동이 위엄 있게 자리하고 있다. 전통 한옥은 우아하고 고상해 보여 매안 종가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당에서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색다른 풍광을 만나게 된다. 멀리는 장수 팔공산이, 그 오른쪽 옆으로는 보절면 천황산이, 그리고 옆의 멀리로는 지리산이 에워싸고 있다. 뒤로는 노적봉과 계관봉이 바로 위에서 굽어보고, 좀 멀리로는 풍악산이 굽어본다. 빙 둘러 산이 감싸고 있어 평안함을 느낀다.
발밑으로는 노봉마을이 비스듬히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로 농민들 마음의 고향인 무논들이 널다랗게 펼쳐져 있다. 아니 웬 산속에 이런 평야가 있단 말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노적봉 기슭이 시작되는 곳이니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약간은 높은 곳에 위치한 혼불문학관이다. 이곳에서 둘러보고 내려다보는 풍광은 하동 평사리의 토지문학관을 연상케 한다. 혼불문학관의 옆쪽으로 푸른 물이 넘실대는 청호저수지가 위치하고 있다.
혼불문학관 전시관에는 유물 전시실과 집필실인 작가의 방, 주제 전시실이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의 얼굴과 자필 글씨인 ‘최명희 혼불’이란 글이고 생전에 작가가 사용했던 만년필과 잉크병이 인상적이다. 작가의 만년필과 그 옆에 놓인 꼼꼼하고 치밀하기까지 한 작가의 취재 수첩과 자료집이 있다.
『혼불』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사매면 온 마을과 전주, 중국의 만주 봉천(현재의 심양)을 누비며 집요하리만큼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했던 열정적인 작가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작가의 생전 모습, 수상 경력, 작가로서의 삶, 그리고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을 때부터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혼불』의 역사가 그 곳에 있다.
작가 최명희의 발자취를 알아볼 수 있는 유품 자료 전시실을 지나면, 작가의 집필 방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다. 복도 양쪽으로 최첨단 디오라마가 이어진다. 강모와 강실이가 복사꽃 아래서 소꿉놀이하는 장면, 강모와 효원의 혼례식, 액막이 연 날리는 모습, 춘복이 달맞이 장면, 청호저수지가 말라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 등 소설 속의 주요 장면들을 인형과 모형들로 꾸며 놓았고 음향 효과도 들을 수 있다.
혼불문학관 전시실을 나오면 옆 건물의 교육관에 큰 대청 마루가 자리하고 있다. 한옥의 기둥과 마루, 대들보에 드러난 나뭇결의 무늬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문학관을 찾아 이 곳 올라 숨을 고르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 시원한 바림이 불어오고 내려다보이는 풍광에 가슴이 후련해진다.
[매안이씨의 매안이 무엇일까]
전주에서 남원으로 국도 17호선을 달리다 임실군 오수면 애견공원을 지나 곧게 뻗은 도로를 5분을 달리면 오른쪽으로 혼불문학관의 이정표가 나타난다. 오른쪽의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10분 정도 달리면 『혼불』의 배경지 노봉마을에 도착한다.
오수를 지나면서 곧게 뻗은 도로는 최근에 개통한 도로이고 예전의 국도로 오수를 지나면 오른쪽에 춘향과 이도령이 인사하는 “춘향골 남원, 어서오십시오.”라는 큰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남원인데 이곳이 남원시의 관문인 덕과면이다. 덕과면 소재지를 지나면 바로 사매면에 이른다.
『혼불』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은 매안이씨인데, 이때 매안은 매안방이라고 하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사매면, 매안방에 매화 매(梅)자가 공통으로 들어 있어 매화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곳에는 매화꽃이 많이 피어 있단 말인가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주변에는 매화나무를 많이 볼 수 없다. 아니, 매화나무도 없는데 왜 매화나무 매(梅)자를 사용했을까? 그렇다면 예전에는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지금은 나무를 다 베어버려서 없단 말인가?
사매면, 매안마을 하는 것은 실제로 매화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풍수지리상 이곳 지형의 특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실 우리나라 지명 중 매(梅)자가 들어가는 곳이 많은데 그런 곳들은 대부분 풍수지리와 관련을 맺고 있다. 매 자가 붙은 곳의 지형은 매화꽃이 떨어지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어서 좋은 곳이고 좋은 땅이라고 한다. 풍수에서 좋은 형국, 좋은 혈(穴) 자리는 많이 있는데, 특히 나무나 꽃과 관련된 것을 식물혈이라고 한다.
식물혈에는 매화혈(梅花穴), 연화혈(蓮花穴), 모란혈(牡丹穴)이 있다. 매화혈에는 매화낙지혈(梅花落地穴), 매화만발혈(梅花滿發穴) 있는데 주로 지명에는 매화낙지혈이 많지 매화만발혈은 보기가 어렵다. 꽃이 만발한 것보다는 하얀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더 아름다워서 그런지 매화낙지형이 대부분이다. 청암 부인이 손자 강모에게 매화낙지형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이 설명을 듣고 강모는 그날 밤 매화 꽃잎이 날리는 꿈을 꾸는데 사실 그 꽃은 강실이네 집 살구나무 꽃잎이었다.
할머니 청암부인이 강모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들판은 매화낙지다. 산에 가로 막혀서 더 뻗어나가지 못한 것이 서운은 하다만, 땅의 지세가 아주 좋으니라.”
“매화낙지?”
“매화 매(梅), 꽃 화(花), 떨어질 락(落), 따 지(地), 그렇게 쓰지.”
“꽃이 떨어지는데 무엇이 좋은가요?”
“이 사람아, 꽃은 지라고 피는 것이라네. 꽃이 져야 열매가 열지. 안 그런가? 내 강아지.”
청암부인은 어린 강모를 무릎에 올려 앉히며 궁둥이를 토닥여 주었다. 토닥이는 소리가 강모의 가슴을 쿵쿵 울리게 하였다. 그날 밤, 강모는 그 아득한 들녘 먼 곳까지 하염없이 하염없이 매화 꽃잎이 날리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온 마을의 지붕과 언덕, 그리고 하늘을 자욱하게 덮으며 눈처럼 날리었다.
어찌 보면, 그 꽃잎들은 오류골 작은 집의 토담가에 서 있는 늙은 살구나무에서 휘날리는 연분홍 살구꽃잎인가도 싶었다. 그만큼 작은집의 살구나무는 우람한 아름드리였던 것이다.
[사매면도 매화나무네!]
그런데 사매면이 처음부터 사매면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데에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 행정구역의 명칭으로 방(坊)이 있었는데 오늘날의 면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남원에는 48방이 있었는데 이 지역인 사매면에는 사동방(巳洞坊)과 구내방(丘內坊)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매면이 하나의 면이 아니고 두 개의 면인 사동면과 구내면인 셈이었다.
구내면은 언덕 구(丘)자를 사용하고 있으니까 언덕 안에 위치한 고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백성들이 임금님이나 성인의 이름자를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감히 높은 분들의 이름자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성인을 우러러 받들지 않고 없수이 여긴다고 생각해서 그 글자는 피해서 다른 글자로 대체해서 사용했다.
공자는 태어날 때 뒤꼭지가 툭 튀어나와서 꼭 언덕처럼 생겼다고 하여 언덕 구(丘) 자를 이름으로 사용했다. 그러니까 공자의 본명은 공구이다. 공자할 때 자는 성인, 성현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가 송구스러우니까 존칭의 의미인 자(子)를 붙여서 불렀다.
예전의 사람들은 높은 분들의 이름자를 피해서 사용하지 않는데 어떻게 감히 공자의 이름인 구를 구내방의 구(丘)자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발상을 지금 한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랬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정엽이라는 남원부사가 구는 공자의 이름이니까 꺼리는 것이므로, 즉 휘(諱)이므로 지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손하다 하였다. 그가 이곳 구내방을 유람하다 지형을 보고 지은 매화시(梅花詩)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연유하여 구(丘)자를 매(梅)자로 고쳐 매내방이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구내방은 매내방이 되었고, 매안방이라고도 하였다.
매안방은 대신리 상신마을에 매화락지(梅花落地) 명당이 있어 매안방(梅岸坊)이라 한 것이다. 사동방도 풍수지리에 의한 지명인데 거멍굴 옆 마을인 인화리(仁化里)에 뱀머리인 사두혈(巳頭穴) 명당이 있어 사동방(巳洞坊)이라 하였다고 한다.
『혼불』의 배경지로 되어 있는 노봉마을은 사실 사동방에 속하는 곳이니까 종가는 사동이씨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사동방보다는 사군자 중의 하나인 매화나무와 관련이 있는 매안방의 이름이 더 아름답게 보여서인지 매안방의 매안이씨를 빌어다가 사용하고 있다.
사매면 소재지 왼쪽 편으로 용북중학교 가는 길이 있는데 옆의 매내천을 따라 3㎞정도 가면 대신리 상신마을과 대산마을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매안방이다. 본래는 여의(如意)터, 매안(梅岸)골, 원매안(元梅岸)이라 하였는데 대산리와 상신리를 합쳐서 대신리라 하였다.
여의터는 마을 뒤에 370m의 계룡산이 있는데 용의 형상으로 여의주를 물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에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매안이씨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주이씨이다. 상신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전주이씨는 세종의 증손인 이정숙의 자손들이다. 『혼불』에서의 매안이씨는 매안마을에서 유추한 것이다.
[서도역부터 시작하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4㎞ 정도 따라가다 어느 정도 논이 넓게 펼쳐진 평지가 나타나면서, 논 가운데 간이 기차역인 서도역이 나타난다. 서도역에 당도하기 전에 삼거리를 만나는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상민, 천민이 살았다는 거멍굴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서도역, 노봉마을로 간다.
산길과 논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강모의 아내 효원이 순천에서 신행올 때 전라선 기차를 타고 서도역에서 내리는 장면을 묘사했던 자그마한 간이역 서도역을 만날 수 있다. 서도역을 지나 철길 건널목을 통과하여 좌측을 보면 교회가 있는 서촌마을이 있다. 그 옆길을 따라 또 한참을 가면 호성암을 품고 있는 567m의 노적봉 아래 노봉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매안까지는 정거장에서도 ‘한식경이나’ 걸어 들어가야 한다 라고 최명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은 다들 차로 이동을 하니까 한식경이나 걸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없다. 사매면 소재지에서 노봉마을을 제대로 가려면 힘이 들더라도 터벅터벅 걷다가 늦바우고개에서 쉬면서 쉬엄쉬엄 걸어서 가야 꾸불꾸불한 길이라는 의미와 한식경이라는 의미를 오롯이 알 수 있다.
그래야만 매안이씨 종가의 청암부인과 율촌댁, 효원, 이기채, 강모와 강실이 그리고 거멍굴의 공배네, 춘복이, 옹구네의 목소리를 생생이 들을 수 있다. 예전에 성철 스님을 만나려면 3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아마 3천배를 하려면 10시간은 땀에 뒤범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투자를 해야, 노력을 해야 값진 것을 만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가면 겉모습만 만나는 것이다.
[목숨의 불, 혼불 이야기]
혼불이란 우리 몸 안에 있는 불덩어리이다.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혼불은 목숨의 불, 정신의 불이다. 우리 몸속에 있다가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혼불로 존재의 핵이 되는 불꽃이다. 이러한 존재의 핵, 우리 민족의 핵, 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혼불』이다.
『혼불』은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최고 성과로 평가받아왔다. 이 소설은 1938년부터 1943년까지의 이야기로, 전북 남원 사매면 매안마을에서 몰락해가는 한 양반가를 지키는 며느리 3대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 세계를 탁월하게 구현해낸 작품이다. 양반촌인 매안마을과 매안의 그늘에서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 마을 거멍굴이 공존하고 있다.
매안과 거멍굴의 정신적 지도자는 이씨 문중의 종부(宗婦) 청암부인이다. 그녀는 열아홉에 청상이 되어 쓰러져가는 집안을 5천 석지기로 일으켜 세우지만 손자 이강모대에 이르러 가문의 영화는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천성이 유약한 강모는 가문의 대를 잇는 일을 버거워하다 만주로 떠난다.
때마침 거멍굴의 상민들도 종으로 짓눌려 왔던 지난 세월의 한을 되갚으려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상민이 종가 마루를 쇠스랑으로 내리찍는가 하면 무당·무부의 뼈를 청암부인의 묘에 밀장하기도 하며, 상민 춘복은 금지옥엽인 강실을 범한다. 청암부인의 별세 이후 가문을 지키는 일은 이제 3대 종부인 강모의 아내 효원의 몫으로 남겨진다.
『혼불』에서 작중 인물의 행위나 존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종부 3대의 축이다. 청암부인, 율촌댁, 효원으로 이어지는 종부 3대를 핵심적인 줄기로 하고, 그 중심에 청암부인이 있다. 둘째는 애정의 축이다. 강모와 강실의 비극적 근친애, 강모와 효원의 어긋난 부부 애정을 중심 줄기로 하고 있다. 셋째는 정치의 축이다. 강호, 강태, 강모의 이념적 갈등과 거멍굴의 천민과 고리배미의 상민들에게서 신분상의 갈등,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줄거리만으로는 가족사 소설 혹은 일제 하의 사회 격변을 그려낸 사회사 소설로 보이지만 『혼불』은 그 이상의 ‘교과서’적 의의를 갖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혼불』에 그려진 호남 지방의 혼례, 상례 의식과 정월대보름 등의 절기맞이 풍습을 귀한 사료로 친다. 전통적인 생활 습관, 사회 제도, 세시 풍속, 관혼상제, 복장, 음식 등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복원하고, 사람들 사이의 얽히고 설킨 사랑과 증오, 가문의 번영과 몰락, 민간 신앙과 풍습을 통해 그들 마음의 무늬를 그리고 있다.
최명희는 작품을 쓰면서 민속학적인 사실 등을 철저히 고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직접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발로 조사하여 가슴으로 부여안고서 『혼불』을 집필하였다. 민속학 사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면서 몸으로 느끼고 호흡한 결과로 나타난, 철저한 고증의 결과이다.
작가 최명희는 취재 수첩 「길광편우」(‘상서로운 빛(생각)이 깃털처럼 나부낀다’는 뜻)를 들고 1993년 여름 내내 중국의 북경·심양·연길을 헤맸고, 남도 지방에 남아있는 우리의 고유어와 풍속을 깨알같이 메모했다. 전통 문화와 풍속이 생명력을 얻는 것은 예스러운 정취와 진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우리말 고유의 리듬감과 울림을 살려 낸 그의 문체 덕분이다. 최명희 작가는 『혼불』의 집필 태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 작품의 한 부분을 따로 떼어 내거나, 나아가 한 문장만 읽어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도록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에도 머뭇거렸다. 이는 인간과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우리 삶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한번 쓰기 시작하자 저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사로잡은 이 작품 때문에 밤이면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했다.”
최명희는 10권으로 『혼불』을 일단 마무리했지만 아직도 완간이라는 말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6·25, 4·19의 이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더 쓰겠다고 했다. 그리고 『혼불』의 집필 및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다짐을 지켜볼 수 없게 되었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혼불』의 집필에만 매달렸던 최명희는 뜻하지 않은 손님을 만나게 되었다. 난소암이다. 최명희는 암과 싸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암은 매우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나를 찾아온 손님이기 때문에 극진히 대접해서 섭섭지 않게 떠나보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지옥의 고문보다 더 무시무시한 항암제 치료의 과정을 불평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견디다가 갔다.
사람들은 최명희가 집필에 매달렸던 서울 청담동 성보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고, 그 성보암에서 최명희는 도를 닦는 주지 스님이었다. 마지막 탈고 4개월 동안은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1998년 12월 11일 쉰 한 살의 나이로 이승의 삶에 마침표를 찍었다.
[최명희의 문학 정신]
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 조상들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의 해결 과정이 『혼불』의 의미이다. 자신에 대한 그리움의 해소, 우리 민족에 대한 궁금증의 해소에 목말라하면서도 결코 서둘러 물을 마시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마를수록 물을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면서 갈증을 삭여 나갔다.
“많이 쓰고 빨리 쓸 수 있고 정보를 입력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수정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은 나한테 컴퓨터 쓰기를 권한다. 그러나 문득 한번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이’ 쓰고 ‘빨리’ 써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사뭇 의아해진다. 무엇보다 나를 황홀하게 사로잡는 것은 만년필의 촉끝이다.
글씨를 쓰면서도 흘리어 순간순간 그 파랗게 번뜩이는 인광에 한숨을 죽이게 하는 촉끝은, 한밤중에도 눈뜨고 새파란 불을 밝힌다. 나는 때때로 내가 본 이 세상의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이 만년필 눈이 아닌가, 찬탄을 금치 못한다. 만년필 등에서 날렵한 촉끝으로 쏟아지며 또 다른 불꽃을 일으킬 때, 나는 우주와 만년필의 교감에 전율하였다.”
최명희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는 이면의 현상을 보고자 하였다. 큰 나무가 있으면 그 밑둥인 뿌리도 나뭇가지만큼이나 무성하게 뻗어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나무 화병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깎여나간 나무를 생각하고, 화려한 목걸이에서 보이지 않는 목걸이의 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 정신이다.
[20세기와 최명희 세대]
한국의 역사가 이어지기 시작한 이래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 속도가 가장 급속한 것은 최근세 100년 동안이다. 최근세 100년은 농경 사회가 산업 사회로 변화되면서 농경 사회에서 파생되었던, 관련되었던 민속 문화가 현대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로 변화되었다.
즉 수 천 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농경 문화가 단절되고 현대 문화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는 시기이다. 근대 100년은 현대화, 선진화의 문화 도입기로 서구화된 시기이지만 전통 문화의 측면에서는 전통 문화가 단절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질 문화가 파고 들어온 시기이다.
우리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새로운 문화를 도입해야만 했던 개항기,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고 신문화는 우리의 농경 문화, 전통 문화와 대립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신문화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면서 전통 문화의 붕괴 현상이 생긴다. 조선시대 문화의 불합리한 면이 갑오개혁을 통하여 혁파된다.
문화 현상의 측면에서는 신구 문화의 갈등이 일제강점기를 통하면서 신문화의 우월성이 자리 잡게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전통 문화는 위축되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새로운 교통 문화인 기차가 생기고, 신분 제도가 붕괴되면서 나름대로의 신질서가 형성된다.
그러다 광복을 맞이하게 되고,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게 되면서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는 전쟁이 발생한다. 3년간의 전쟁은 불완전한 상태로 휴전이 되고, 이어서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서구 문화의 유입이 가속화된다. 그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업화, 현대화가 숨 가쁘게 이루어지면서 생활이 윤택해졌다. 산업화, 근대화의 혜택 대신 우리는 전통 문화의 상실이라는 뼈아픔을 감수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가 세대 간의 갈등, 세대 간의 대화 부재 현상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세대 간의 갈등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세대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 ‘아버지 지우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세대 갈등이란 연령적으로 문화적 단층화 현상이 나타나 이것이 사회 갈등으로 표출되는 양태를 말한다. 사실 ‘아버지 부정’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진통이다. 젊은이가 훗날 아버지의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이처럼 세대 갈등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인류의 오랜 삶의 과정이다.
사회의 발전 단계에서 세대 간에 서로 향유하는 문화가 변화되기 때문에 세대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사적 체험이 확연히 다른 아버지와 자식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비정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세대 간 갈등은 점진적인 갈등의 도를 뛰어넘는 극심한 갈등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문제시된다. 60대는 전쟁 세대, 50대는 4·19세대, 40대는 유신 세대, 30대는 5·6공화국 세대, 20대 이하는 신세대로 볼 수 있다. 현대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세대 갈등의 문제가 있지만 전통 문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세대 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60대 이상인 해방 전 세대는 식민지 상황을 경험하였고, 건국 과정과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연령층이다. 이들은 식민지 경험을 통하여 민족주의 의식을 내면화하였으며 독립된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을 시대적 사명으로 자각했던 세대이다. 이 세대는 전통적 농업 사회의 사회적 기반에서 성장함으로써 권위주의, 집합주의, 특수주의와 같은 전통적 가치관에 익숙한 세대이다. 60대는 한국의 전통적 생활 방식의 연장선에서 생활을 영위한 세대이고,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하고 이어온 세대이다.
50대와 40대는 국제적인 냉전 체제와 국내의 이념적 갈등이라는 환경 속에서 성장한 기성 세대로서 강력한 반공 의식을 내면화하고 민주적 시민사회의 질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을 지녀 온 세대이다. 50대는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일지라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전쟁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있지 못한 반면, 4·19혁명과 5·16쿠데타 그리고 한일조약 반대 투쟁(6·3사태)이 성장기의 중요 사건이었다. 40대는 경제 성장 정책, 유신 등이 깊은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사건 속에서 40대나 50대는 민주화의 이상과 권위주의적인 정치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해 온 세대이다.
50대와 40대는 산업화의 진전으로 현대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나 성장기의 교육 체제는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사고를 여전히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전통적 가치관, 전통 문화의 측면에서 볼 때 과도기 세대이다. 머리로는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있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은 세대이다. 즉 이들 세대는 60대의 전통 문화를 보면서 성장했지만 자신들의 세대는 빠른 산업화, 서구화의 영향으로 전통 문화와 현대 문화의 양쪽 문화를 동시에 경험한 세대이다.
반면 30대와 20대는 안정적 산업화의 환경에 속했던 세대로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지낸 세대이다. 서구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합리적, 이성적 사고를 하는 세대로 컴퓨터를 통한 의식 공간을 확산하는 세대들이다. 이들 젊은 세대는 전통 문화, 전통적 가치관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서 전통하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당연한 일처럼 인식한다.
전통은 수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높다. 그만큼 전통에서 거리가 멀어졌다는 의미이다. 젊은층으로 갈수록 한국인이면서 서구적인 사고 방식과 생활 문화에 익숙한 서구적 한국인이다. 반면 노년층일수록 한국적 한국인이다.
전통에 대한 인식을 각 세대별로 살펴볼 때 60대는 향유층, 50대와 40대는 인지 후 비향유층, 30대와 20대는 몰인지, 비향유층이다. 아마 10대는 극단적 몰인지, 절대 비향유층이 될 것이다. 최근세 100년 동안 전통 문화는 향유층에서 절대 비향유층으로 급격히 변화되었다. 현대는 같은 한국인이면서 서구적 한국인과 한국적 한국인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된다면 30년, 50년 후 더 나가서 100년 후에는 무엇이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것, 우리의 전통 문화가 소멸되어 가는 오늘날 진정한 생명체, 정신은 ‘혼불’이다. 근원에 대한 그리움, 근원의 복원은 진정한 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제는 이러한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의식마저도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최명희의 세대 즉 50대만이 근원에 대한 해답을 전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최명희는 이러한 의식이 머리 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할 정도로 전통 문화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 50대인 작가의 세대는 전통 문화를 전수할 수 있는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다. 최근세 100년 동안에서 50대가 짊어지고 있는 역사적 사명감의 인식에서 『혼불』은 나타나게 되었다.
『혼불』의 시대인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생명인 혼불을 빼앗긴 어두운 시절이다. 『혼불』은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억눌린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의 꺼진 혼불을 환하게 지펴올리는 해원의 과정이다. 매안이씨 양반가와 거멍굴 천민이 해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낸 민족혼, 한국의 삶, 한국인의 의식은 혼불로 상징화되고 복원되었다.
최명희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무엇 때문에 17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불에 매달려야 했으며, 결국에는 어느 누구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애걸해야만 했을까. 그야말로 구걸이었단 말인가. 아마 개인적인 차원의 구걸이었다면 그 긴 17년을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17년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인 소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족적 소명이다.
[소설을 뛰어넘는 사상서이다]
최명희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감히 시도하지 않았던 한국적 한국인을 보여주고자 50여 년의 세월을 『혼불』과 함께 하였다. 한국인의 심상과 사상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에 때로는 아주 지루하지만 그 많은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갈 수밖에 없었고, 또 때로는 많은 원전을 그대로 인용하는 노력을 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흥부전』이나 설화의 내용, 일본 음악학교 교과서, 언간, 역사 내용 등 많은 부분을 원전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을 보고 지루하게 생각할 수 있다. 최명희는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러한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적 한국인을 드러내고자 하는 적극적 의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석에서 말할 때 최명희가 너무 무사안일한 것이 아닌가 하여 화가 난 적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때론 작가의 자기 현학적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고 말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기가 하나 아니까 그것을 끌어들여서 쓰기 위해 이것저것 사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만을 토로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정으로 생각해볼 때 작가는 그렇게 경솔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솔함에 자신의 인생을 걸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최명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하여 천군만마가 아니어도 좋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오래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보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 눈길이 바로 나의 울타리인 것을 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소진하면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닌 한국적 한국인의 복원을 위한 노력이었다. 한국적 한국인의 복원은 한국의 다양한 사상과 일상사를 보여주어야 했고 심지어는 매안의 지세 등 자연 지리까지도 자세히 묘사해야만 했다.
『혼불』이 추구하는 사상을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인간 존중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인물을 그 역할에 따라 주동 인물과 부동 인물로 구분하고 주동 인물은 중심에 위치하여 작품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혼불』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과연 누가 주동 인물이고 누가 부동 인물일까.
인물군을 종가의 인물군과 거멍굴의 인물군으로 나눌 수가 있다. 종가 인물군이 주동 인물군이고 거멍굴 인물군이 부동 인물군인가. 거멍굴의 인물군이 『혼불』의 상당 부분을 이끌어가기 때문에 주동 인물군임에 틀림없다.
또 종가 인물군 중 청암부인, 효원만 주동 인물군인가? 일반적으로 주동 인물은 죽지 않고 작품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이 일상적인데 청암부인이 주동 인물이라면 이런 법칙에서 벗어나 있지 않는가. 물론 혼불이 효원에게 유입되어 이어지긴 하지만. 또 말없이 속을 끓이고 가슴앓이를 하는 강실이도, 강모도 주동 인물군에 속한다.
반면 거멍굴의 춘복이와 옹구네도 적극적인 주동 인물군에 속한다. 비교적 그 역할이 짧게 끝나긴 하지만 백단이나 쇠여울네의 행동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혼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다 주동 인물들이다.
『혼불』은 어느 한 인물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충실히 한다. 다시 말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것들도 모두 다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혼불』은 출발하고 있다. 이 세상에 의미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인간 존중 사상이 『혼불』을 이끌어가고 있다.
둘째, 『혼불』은 순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강호와 도환이 동남서북 사방위의 사천왕을 이야기한다. 이때 대칭적 방위 개념인 동서남북이 아닌 순리적, 순환적 방위 인식 개념인 동남서북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이 인지하는 세계관은 불합리하고 인위적이며 대립적인 인지 구조에서 출발한다.
『혼불』에는 일상의 사고에서 벗어난 상식의 허를 찌르는 설화(효다리, 인다리 설화 등)나 사건(유자광 설화 등)들이 많이 있다. 즉 일상적 인지 세계관에서 파생된 제도, 관습, 윤리 등은 인간 본성에서 어긋난 것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사실을 따르는 무리와 거스르는 무리 간의 갈등 속에서 순천자의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혼불』에는 순리에 순응하는 참다운 인간상을 추구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셋째, 『혼불』에는 공존 공영 사상이 있다. 춘복이가 덕석말이를 당해 몸뚱이가 너덜너덜해졌을 때 강호는 거멍굴을 파격적으로 찾아가 약값에 보태라고 봉투를 건넨다. 택주는 모갑이가 시궁창에서 삼년을 썩혀 만든 나무 화병을 강호에게 건넨다. 강호는 화병의 아름다움과 자태에 감탄한다.
그런데 사실은 최명희님은 아름다운 화병이, 조각품이 있기 위해서는 깎여져나간 나무 조각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남아있는 조각품의 아름다움만을 생각하고, 그 이전에 그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해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음을 간과한다. 또 큰 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것은 그 크기 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땅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 화려함의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고, 그러한 세계도 동등하게 그 중요성과 아름다움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혼불』은 종가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으로 거멍굴이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다. 『혼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 내면 세계의 중요성을 찾고자 하는 공존 공영 화해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이러한 인간 존중 사상, 순리 순응 사상, 공존 공영 화해 사상은 바로 한국의 전통적 사상이며 『혼불』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다. 『혼불』은 이러한 사상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 기존 소설의 구성법, 묘사법, 서사법을 뛰어넘어야 했다. 『혼불』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임과 동시에 소설 장르를 뛰어넘은 사상서이다. 최명희 작가는 소설가임과 동시에 사상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