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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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陶窯址 |
영어음역 | doyoji |
영어의미역 | kiln site |
이칭/별칭 | 가마터,요지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집필자 | 김진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토기나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던 터.
[개설]
도요지(陶窯址)는 토기나 도자기를 구워 내던 가마 유적으로, 우리말로는 가마터라고 한다. 광의적 정의로 가마터란 각종 토기, 도기, 자기, 벽돌, 기와 등을 고온에서 소성하던 구조물을 말한다. 또 목탄을 만들기 위한 시설물도 목탄가마, 또는 탄요(炭窯)라 하여 같은 범주에 넣는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마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원삼국시대(철기시대)에 속하는 김해 대성동 가마터이다. 하지만 이 토기가마는 구조가 잘 남아 있지 않아 가마의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원삼국시대 전기의 가마로는 광주 신창리 유적과 승주 대곡리 유적에서 각각 조사되었다. 신창리 유적의 가마는 굴가마는 아니지만 경사면이 완만한 개방요가 발견되었고, 대곡리 유적의 가마 역시 완만한 경사도를 가진 가마이다. 그리고 진천 삼룡리 유적과 해남 군곡리 유적의 가마들은 굴가마로서의 형태를 갖추었다. 특히 진천 삼룡리 가마는 지하식과 반지하식이 섞인 구조로, 가마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원삼국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진천 산수리의 가마를 보면, 타원형의 평면을 가진 가마이며, 가마 바닥이 경사져 올라가는 굴가마의 일종이다. 불길의 안내방식에서 보면, 이 산수리 가마들은 연소실이 소성실과 일직선으로 배치되기는 하지만, 연소실에서 소성실로 이어지는 부분이 계단식으로 올라가게 하였다.
백제 지역에서는 진천 산수리 가마와 비슷한 시기에 해당하는 전라남도 승주 대곡리 취락유적의 가마가 있고, 훨씬 늦은 시기에 속하는 고창 운곡리 유적과 익산 신용리 유적의 가마가 있다.
운곡리 가마는 평면 형태가 원형에 가깝고, 가마 바닥은 완전 평면으로, 그 둘레에 도랑을 판 특이한 구조이다. 신용리 토기가마는 산수리 가마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가야 지역에서는 4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되는 창녕 여초리의 토기가마가 대표적이다. 가마는 기본형이 산수리 가마와 같지만, 좀더 세장하고 연소실이 소성실과 동일한 평면에 놓이는 등 발전된 형태이다.
손곡동의 토기가마들은 익산 신용리 유적의 가마들과 유사한 형식으로, 각각 신라와 백제의 영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속하는 두 유적의 가마 구조가 극히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이들 가마는 산수리·여초리 가마와 함께 기본형이 장타원형의 굴가마라는 점에서 동일한 계통에 포함된다.
손곡동과 신용리의 가마는 가마바닥의 경사도가 일률적이지 않고,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가면서 경사도가 훨씬 커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가마 안에 열기를 오래 체류시킴으로서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삼국시대 가마 중에서 특별한 예가 충청남도 부여 정암리 가마이다. 이 가마는 백제시대에 기와를 굽던 가마인데, 가마의 구조가 중국 수당 시대 북방 지역에서 유행하던 형식에 속한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삼국시대 가마는 모두 타원형의 평면형을 가진 굴가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토기가마 양식은 경주 망성리와 화산리·덕산리, 서울특별시 사당동, 부산광역시 두구동, 충청남도 보령 진죽리, 전라남도 영암 구림리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그중 보령 진죽리 유적과 영암 구림리 유적의 토기가마는 삼국시대 말기의 가마와 비교해서 구조적인 차이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후 고려의 가마는 자기를 굽는다는 점에서 토기가마와는 격을 달리하며 구조적인 면에서 훨씬 진보한다. 우선 가마가 중국의 자기가마인 용요 계통과 흡사한 세장방형의 대형 가마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까지도 토기가마는 길이가 불과 10m 미만이었지만 초기 청자를 생산했던 용인 서리(西里) 가마의 길이는 약 40m로 추정된다. 가마의 벽은 반듯한 세장방형으로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양질의 자기를 굽기 위해 갑발을 사용하는 등 요업 기술이 발전하였다. 고려 중기와 후기의 청자를 굽던 가마 중에는 가마의 길이가 80m를 넘는 것들도 있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가마는 청자가마의 기본 구조를 계승하면서 분청사기와 백자로 발전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2백여 개소의 가마터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요업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용계리 분청사기 가마터와 선운리 백자가마 유적 등은 불창기둥과 불턱을 축조하여 계단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남원의 도요지]
현재 남원 지역에서 조사된 도요지를 살펴보면 대강면에 세 곳, 대산면에 한 곳, 운봉읍에 두 곳, 산동면에 한 곳, 이백면에 한 곳, 보절면에 한 곳, 왕정동에 한 곳 등 모두 열한 곳이다.
조선 중기의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유명한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의 도조로 추앙받는 등 일본의 도자기 공업을 발전시켰는데, 이때 끌려간 도공 중에 남원 출신이 많았다. 일본 도자기의 대명사격인 사스마야끼의 14대 주인인 심수관의 조상 역시 남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