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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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原錦南齋 |
영어음역 | Geumnamjae |
영어의미역 | Geumnamjae Shrine |
이칭/별칭 | 함양오씨재실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 564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유종국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3년 6월 23일 - 남원금남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15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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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남원금남재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별장 |
양식 | 전통 가옥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좌우 각각 3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 564[금암길 22-12] |
소유자 | 사유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사묘.
[개설]
조선 전기 문신인 금남(錦南) 오응(吳凝)이 자신의 할아버지 묘소 근처에 세운 별장이다. 지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응의 호가 금남이라 금남재(錦南齋)라 불렀다.
오응의 할아버지 오상덕(吳尙德)은 고려 후기의 충신으로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그는 두문동 72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세상의 영욕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에서 스스로 두암(杜庵)이라는 호를 붙였다.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이색(李嗇),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왕에게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그는 방촌(尨村) 황희의 자형(姉兄)이며, 벼슬로 소부시(小府寺) 소감을 지냈으나, 조선 개국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고려의 유신들과 절의를 지켜 추앙받았다.
그는 대강면 풍산서원에서 제향하여 왔으나 자신들의 조상을 남의 가문에서 계속 모시게 할 수 없다며 오씨 문중에서 금남재 옆에 술산사(述山祠)를 지어 따로 모시게 되었다. 오응이 이곳에 금남재를 지은 것은 이곳이 함양오씨의 고향일 뿐 아니라 근처에 할아버지 오상덕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변천]
남원금남재가 지어진 시기를 알 수 없다. 현존 건물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남원금남재는 1.3m 높이의 축대 위에 서 있다. 이 건물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일(一)자형 안채 건물 좌우에 각각 3칸의 건물을 달아 전체적으로 ㄷ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세 건물은 모두 잘 다듬어진 화강암의 축대 위에 세워졌으며,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다.
평면은 좌측에 2칸 대청이 있고, 이어 한 칸의 방이 딸려 있다. 대청의 일자형 건물 좌우에는 역시 일자형 건물을 이어 붙여 전체적으로 ㄷ자 형으로 구성되었다. 양 날개의 건물은 건립 당시의 것인지 후대에 붙여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오른쪽 날개는 방 2칸과 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몸체와의 사이에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좌측 날개는 한 칸씩 각각 부엌, 방, 마루로 구성되었다. 목조 건물로 네모난 기둥을 사용하였다. 몸체 중앙에 권직상이 쓴 ‘금남재(錦南齋)’라는 현액이 달려 있다.
[현황]
현재의 건축물은 몇 차례 중수하고 수리한 것으로, 많이 퇴락해 있다. 잘 가꾸지 않고 주민들이 여럿 거주하고 있어 고건축물에서 느끼는 전아한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