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312 |
---|---|
한자 | 南原-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생활·민속/생활 |
유형 | 물품·도구/물품·도구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미정 |
[정의]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고 햇빛을 가리는 전라북도 남원시의 특산품.
[연원 및 변천]
남원부채의 경우 1925년경에는 당시 조산리에 부채산업조합을 설립하여 만주와 일본 지역에까지 수출될 정도로 유명했다. 한지에 그림과 글씨로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간결하고 원만한 선으로 멋을 살린 남원의 부채는 주로 태극선과 방구부채를 제작했는데 그 품질이 우수해 전국 제일로 꼽힌다.
전라북도 남원시 조산동에는 부채 단지가 있는데, 부채는 남원의 특산물로서 수요가 날로 급증하여 조산동민들의 주업이 되었다. 이곳에 부채 단지가 조성되고 전래된 것은 처음 부채 만드는 것을 보급시킨 강찬영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강찬영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의 몸이 되었지만 생활력과 창의력이 누구보다 강하여 자립하려는 의지로 여러 가지 일을 시도하였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에 구애를 받지 않고 자본이 적게 드는 일을 궁리하다가, 당시 유명세를 떨치던전주 합죽선, 즉 부채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전주로 가서 부채 만드는 기술을 1년 남짓 열심히 배운 그는 고향으로 와서 일을 시작하였다. 이때 조산리는 남원시의 변두리 농촌 마을이었지만 시가지에 근접하여 농사도 짓지 아니하고 놀고 먹는 유한층이 많았다. 강찬영은 이런 사람들을 타일러 부채 만드는 기술을 익히게 하였고, 그중 한 사람인 정사근(井士根)에게 자신의 부채 제조기술을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은 부업으로 부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고,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수입도 많아져 온 마을 사람이 부채 만드는 일에 참여하였다. 지금은 많이 쇠퇴하였지만, 남원 지방 특산물의 하나로 조산동 부채가 유명한 것은 이때부터 조산리를 부채 제조단지로 형성시켜온 때문이다.
[형태]
부채를 만들려면 먼저 대[竹]를 고르고 숯불에 구어 진을 빼어 대빛을 곱게 하여 부챗살을 만든다. 그러고 나서 부챗살에 맞도록 종이를 접고 살에 종이를 풀로 붙인다. 그 다음 목살을 동여서 사복을 하는데, 보통 은이나 백동으로 한다. 칠부채나 기름부채는 선면(扇面)에 칠을 입히고 들기름을 먹여 3일 동안 말린다.
우리나라 부채는 시속(時俗)에 따라 많은 변천이 있었다. 접부채만 하더라도 큰 것을 좋아하던 것이 점점 작은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또 빛깔도 한동안 방구부채에 흰색과 검은색을 비롯하여 청색·홍색·황색·녹색·자주색의 부채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통속적으로는 흰색·검은색·황색 칠을 한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접부채는 기름을 칠한 유선을 좋아하였고, 흰색 부채를 좋아하는가 하면 그림부채를 또한 좋아하기도 한다.
부채에는 부채고리에 매다는 선추(扇墜)라고 하는 장식품이 있다. 『동국선제변증설』에 의하면 선추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며, 우리나라에는 조선 초부터 있었는데 명나라로부터 전해 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선추는 본래 부채의 분실을 막기 위하여 부채고리에 갈색 명주끈을 매달았던 것으로부터 비롯되어, 후대에 와서는 점차 하나의 사치품으로 애용되기도 하였다.
선추로는 비취 또는 호박 등 보석과 나무·뿔 또는 금속물도 사용되었으며, 금·은·주옥 등을 사용한 것은 축재의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 외에 옥추단(玉樞丹)을 끈에 꿰어 선추로 사용하여 토사나 곽란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깎거나 또는 물에 갈아 마시는 휴대용 구급약으로도 사용하였다.
선추는 보통 직경 3~4㎝ 둘레로 다듬어 양면에 십장생(十長生)을 조각하는데, 인각(印刻)과 통각 두 가지가 있다. 십장생 중에서도 송학의 조각이 가장 어렵기 때문에 송학을 제일로 쳐준다.
접부채는 현재 주로 전주에서 만든 것이 전국 소모량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으며 익산에서도 약간 만들고 있다. 방구부채는 남원을 비롯하여 전주·강경·밀양·서울 등지에서 만들고 있는데, 그 가운데 8할은 남원에서 생산되고 있다.
남원에서 생산되는 방구부채는 연평균 400만 자루 정도이며, 한 가구당 생산량은 적게는 3,000자루에서 많게는 1만 자루씩인데 이것이 중개상을 거쳐 전국 시장으로 팔리고 있다.
부채의 수요량은 점점 줄어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관광공예품의 하나로서 각광을 받게 되어 특산물로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부채는 형태와 표상이 특이한 것이 많아서 외국 관광객들이 좋아한다.
우리나라 부채의 특징은 재료가 대와 한지를 중심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선면에 옻칠을 하거나 들기름을 먹인 것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데, 종류도 무려 80여 종이나 되어 양태가 매우 다채롭다. 그중에서도 남원의 부채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생산품이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부채는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관련이 깊다.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에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던 풍속은 당나라 때부터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 중엽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말까지 성행하였다.
우리나라 풍습에 단선은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사용했고, 접선은 남자들이 외출할 때 들고 다녀 접선을 ‘쥘 부채’라고도 하였다. 즉, 의관을 모두 갖추고 가장 마지막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외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니다가 찬바람이나 먼지를 막기도 하였고, 거북한 상대와 부딪치게 되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부채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또 선비들이 시조나 가곡이라도 한 곡 하려면 부채로 장단을 맞추거나 펼쳤다 접었다 해가며 풍류와 멋을 즐기고 호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양반·무당·판소리·광대용 부채가 유명하였고 남원 태극선과 전주 합죽선은 왕실 진상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