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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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姓氏 |
영어음역 | seongssi |
영어의미역 | family nam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집필자 | 이경석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동일한 인물을 시조로 하는 사람들의 성(姓)을 이르는 명칭.
[개설]
성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거니와 전해지는 자료도 많은 부분 소실되어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으로 고조선부터 왕족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성씨(姓氏)가 이미 단군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이후 차차 성씨가 생겨서, 신라의 육성(六姓), 고구려의 고씨(高氏)를 비롯하여 많은 성이 생기고 고려조에 이르러서는 성씨의 본관(本貫)까지 구분하게 되었다.
[한국의 성씨]
성씨의 종류와 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성씨의 발달 과정은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과 같이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에 성씨가 265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했다는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성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조선 정조 때인 1776년에 이르러서는 성씨가 486성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고종 때 발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6성이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전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성씨 조사에서 250성으로 나타났고, 1934년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대한 연구 조사』에는 326성으로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60년 국세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11성을 포함하여 258성이었고, 1975년 국세 조사에서는 249성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 본관별로 분류하여 실시한 결과 274성으로 확인되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25성이 새로 생겼으며, 성씨의 본관은 모두 3,435개에 이르렀다.
[남원의 성씨]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본래 남원에 살고 있었다는 토착 주요 성씨로 20성이 기록되어 있다.
양(梁)·정(鄭)·진(晉)·양(楊)·견(甄)·황보(皇甫)·이(李)·윤(尹)·황(黃)·염(廉)·배(裵)·유(柳)·최(崔)·고(高)·전(全)·임(林)·안(安)·지(池)·송(宋)·조(曺)
『용성지(龍城誌)』에는 다른 곳으로부터 이거(移居)하여 왔다는 성씨로 28성을 기록되어 있다.
김(金)·오(吳)·소(蘇)·변(邊)·노(盧)·노(魯)·박(朴)·심(沈)·방(房)·우(禹)·서(徐)·진(陳)·조(趙)·신(申)·권(權)·하(河)·손(孫)·마(馬)·차(車)·성(成)·허(許)·정(丁)·채(蔡)·태(太)·형(邢)·원(元)·홍(洪)·유(劉)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운봉현의 성씨로 팔성(八姓)이 기록되었는데, 본현(本縣)에는 박(朴)·문(文)·정(鄭)·신(辛)·전(田), 아요곡(阿要谷)[阿英]에는 문(文)·유(劉)·김(金)이다. 과거 남원부와 운봉현을 합하여, 『용성지(龍城誌)』 등 문헌에 기록된 성이 중복된 것을 빼고 모두 51성으로 나오는데, 1972년 8월 1일 조사에 의하면 총 114성이 나와 있다.
이중에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있되 1972년 조사에 볼 수 없는 성이 황보씨(皇甫氏)와 견씨(甄氏) 등 2성이 있고, 새로이 64종(種)의 성이 등장한다.
강(姜)·강(康)·공(孔)·길(吉)·곽(郭)·국(鞠)·기(奇)·구(具)·금(琴)·남(南)·나(羅)·육(陸)·여(呂)·모(牟)·맹(孟)·민(閔)·목(睦)·방(方)·복(卜)·범(范)·반(潘)·변(卞)·백(白)·빈(賓)·빙(氷)·봉(奉)·부(夫)·사(史)·석(石)·선(宣)·설(薛)·설(偰)·신(愼)·엄(嚴)·여(余)·연(延)·옥(玉)·왕(王)·온(溫)·옹(邕)·위(魏)·유(兪)·유(庾)·은(殷)·인(印)·임(任)·장(張)·주(朱)·주(周)·정(程)·제(諸)·장(章)·진(秦)·천(千)·추(秋)·편(片)·표(表)·하(夏)·현(玄)·한(韓)·도(都)·동(董)·대(大)
1972년 조사시 남원의 인구는 30,298명에 114종의 성씨가 존재하였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김씨가 단연 많아 전체의 20%에 이르고, 남원의 5대 성씨는 김(金)·박(朴)·이(李)·최(崔)·양(梁)의 순으로 나타났으며, 십대 성씨를 열거하면 정(鄭)·오(吳)·강(姜)·장(張)·조(趙)가 이에 포함된다. 십대 성씨는 19,731호로 전체의 65%에 달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자료(성별, 본관)에 따르면 남원의 성씨는 모두 182종이다.
간(簡)·감(甘)·강(姜)·강(康)·강(彊)·강(剛)·견(甄)·견(堅)·경(慶)·경(景)·계(桂)·고(高)·곡(曲)·공(孔)·공(公)·곽(郭)·구(具)·구(丘)·구(邱)·국(鞠)·국(國)·권(權)·금(琴)·기(奇)·기(箕)·길(吉)·김(金)·나(羅)·남(南)·남궁(南宮)·노(盧)·노(魯)·노(路)·도(都)·도(陶)·독고(獨孤)·동(董)·두(杜)·마(馬)·마(麻)·맹(孟)·명(明)·모(牟)·모(毛)·목(睦)·묘(苗)·문(文)·민(閔)·박(朴)·반(班)·반(潘)·방(方)·방(房)·방(邦)·배(裵)·백(白)·범(范)·변(卞)·변(邊)·복(卜)·봉(奉)·부(夫)·빈(賓)·빙(氷)·사(史)·사공(司空)·서(徐)·서(西)·서문(西門)·석(石)·석(昔)·선(宣)·선우(鮮于)·설(薛)·설(偰)·성(成)·성(星)·소(蘇)·소(邵)·손(孫)·송(宋)·송(松)·수(水)·수(洙)·순(荀)·순(順)·승(承)·시(施)·시(柴)·신(申)·신(辛)·신(愼)·심(沈)·안(安)·애(艾)·양(梁)·양(楊)·양(樑)·양(襄)·어(魚)·엄(嚴)·여(呂)·여(余)·연(延)·염(廉)·예(芮)·오(吳)·옥(玉)·온(溫)·옹(邕)·왕(王)·용(龍)·우(于)·우(禹)·원(元)·원(袁)·위(魏)·유(柳)·유(兪)·유(庾)·유(劉)·육(陸)·윤(尹)·은(殷)·음(陰)·이(李)·이(異)·인(印)·임(林)·임(任)·장(張)·장(蔣)·장(章)·장(莊)·전(全)·전(田)·전(錢)·점(占)·정(鄭)·정(丁)·정(程)·제(諸)·제갈(諸葛)·조(趙)·조(曺)·종(宗)·주(朱)·주(周)·지(池)·지(智)·진(陳)·진(秦)·진(晋)·진(眞)·차(車)·창(昌)·채(蔡)··채(菜)·채(采)·천(千)·천(天)·최(崔)·추(秋)·탁(卓)·태(太)·팽(彭)·편(片)·표(表)·피(皮)·하(河)·하(夏)·한(韓)·한(漢)
또한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자료(성별, 본관)에 따르면 남원의 10대 성씨는 김(金)·이(李)·박(朴)·최(崔)·정(鄭)·장(張)·양(梁)·강(姜)·오(吳)·조(趙) 등이다. 상세 내용을 보면 김(金)씨는 6,723호에 19,478명, 이(李)씨는 3,963호에 11,360명, 박(朴)씨는 3,127호에 9,028명, 최(崔)씨는 1,596호에 4,659명, 정(鄭)씨는 1,279호에 3,849명, 장(張)씨는 1,080호에 3,121명, 양(梁)씨는 1,070호에 2,989명, 강(姜)씨는 994호에 2,864명, 오(吳)씨는 969호에 2,777명, 조(趙)씨는 754호에 2,201명의 순이다.
[남원 본관 성씨]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남원양씨를 비롯하여 9성이 있는데 이는 1972년 당시 258성에 비하여 3%의 비율이었으며, 현재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나 18개 정도로 추정되며 2007년 현재 274성의 6% 차지한다. 남원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중 자료가 있는 성씨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남원양씨(南原梁氏)
양씨(梁氏)는 본래 탐라국 삼성씨(三姓氏)의 하나인 신인(神人) 양을나(良乙那)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양을라는 먼 옛날, 한라산의 모홍혈(삼성혈이라고도 함)이 터지면서 그 곳에서 솟아올라 모라천에서 인간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신이다. 그가 신으로 솟아올라 사람이 되었다는 시기는 역사시대 이전이므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벽랑 왕국의 임금이 서해 가운데서 신인이 나타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측하며 공주를 보냈는데, 양을라가 아내로 삼고 탐라국을 세워 양을라는 임금이 되고 공주는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후손들이 900대에 이르며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탐라국의 귀족인 양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의 벼슬로 신라에 들어가니, 신라 국왕이 국빈 대우를 하고 성주(星主)·왕자(王子)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때 양(良)을 양(梁)으로 기록한 것이 양씨로 된 연유로 여겨지고 있다.
제주에 거주하던 양씨 일파가 남원양씨로 관향을 바꾸게 된 계기는 양자영(梁自瀛)[良宕의 8대손]이 통일신라 왕실에 공을 세워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면서였다. 전체 양씨의 약 70%를 차지한다는 남원양씨는 그의 후대에 크게 병부공파(兵部公派)[양능양]와 용성군파(龍城君派)[양주운]로 대별되는데 병부공파가 용성군파보다 훨씬 많아서 남원양씨의 80%를 차지한다.
2. 남원윤씨(南原尹氏)
윤씨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 가운데서도 파평윤씨는 왕비, 학자, 장군 등을 배출하며 세력을 떨쳤다. 해평윤씨·무송윤씨·칠원윤씨·해남윤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평윤씨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는데, 남원윤씨는 바로 파평윤씨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시조 윤위(尹威)는 윤신달(尹莘達)[파평윤씨의 시조]의 8세손이며, 윤관의 증손자이다. 그는 1176년(명종 6) 문과에 급제하여 국자박사, 기거랑, 예빈소경 등 벼슬을 지냈다. 1200년(신종 3) 안렴사(按廉使)로 호남에 갔다가 남원에서 복기남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남원백에 봉해지고, 남원을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후손들은 그 때부터 파평윤씨에서 분관(分貫)하여 본관을 남원으로 삼았다.
3. 남원양씨(南原楊氏)
양씨는 중국 원나라에서 도첨의시중을 지내다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52년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양기(楊起)가 청주백에 봉해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 고종 때 정승을 지내고 중화백이 된 양포(楊浦)를 시조로 하는 계파가 있다.
기록에는 양포의 큰아들 양동요가 김방경 장군의 부하로 진도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에 근거하여 노국공주를 따라온 양기의 1352년보다 82년이나 앞서는 1270년이 되어 양씨는 중화양씨가 청주양씨보다 먼저라는 이야기도 있다. 시조는 양경문(楊敬文)이고 고려 때 영월군백(寧越郡伯)으로 있었다는 기록 외에는 없다. 후손들이 남원에 계속 살았으므로 남원을 본관으로 정하였다.
4. 남원노씨(南原盧氏)[龍城盧氏]
남원노씨의 시조는 고려 때 좌상시(左常侍)의 벼슬을 한 노정(盧挺)이다. 모든 노씨는 그를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여기고 있다. 광주에서 서북쪽으로 5㎞ 쯤에 오치동이 있고 여기에서 다시 1㎞ 쯤 북상하면 삼각산이 나온다. 이 산의 남록에는 노씨들의 시조단인 삼릉단이 있다.
깨끗하게 가꾸어진 잔디밭에 십주(十柱)의 비석이 서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노씨들의 도시조(都始祖)인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노수(盧穗)와 구관(九貫) 노씨의 원조(元祖)가 된다는 그의 아들 구형제의 단(壇)이다.
『증보문헌비고』와 『전고대방』 등에 따르면 당나라 말에 노씨 4형제가 중국에서 건너와 신라에서 벼슬을 하고 장형 노해(盧垓)는 광주백이 되어 광주노씨의 시조가 되고, 다음 노오(盧塢)는 교하백이 되어 교하노씨의 씨조가 되고, 노지(盧址)는 풍천백으로 그 시조가 되었다고 전하나, 노씨들의 가승(家乘)에는 노수(盧穗)가 낳은 9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다.
노수(盧穗)는 본래 중국 범양현 사람으로 당나라 한림학사를 지냈는데 당나라 말엽에 아들 9명을 데리고 뱃길을 따라 평안북도 용강에 닿아, 정주 능리촌에 정착하였다. 아들 9형제는 고려 초기 벼슬을 하여 각 고장에 봉해지고, 이들이 구관노씨의 시조가 된 것이라 전한다. 남원노씨도 이때 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5. 남원남씨(南原南氏)
남씨(南氏)의 시조는 남민(南敏)으로 본명은 남충(南忠)이라 하였다. 그는 원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당나라 현종 때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일본으로 가는 도중 태풍을 만나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표류하였다가 신라에 귀화하여 정착하였다. 이때가 755년(신라 경덕왕 14)으로 왕은 그가 남쪽에서 왔다는 뜻에서 남씨 성을 하사하고 영의공(英毅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양현을 식읍으로 주었다.
여기에서 영양남씨가 비롯되는데,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大將軍]이 아들 셋을 두었다. 장자 남홍보(南洪甫)는 그대로 영양남씨에 적을 두었으나, 차자 남군보(南君甫)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가 되고, 3자 남광보(南匡甫)는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시조로 각각 분적(分籍)하였다. 이중에서 남원남씨의 시조는 남중룡(南仲龍)으로 고려 때 군기감을 역임하였다.
6. 남원진씨(南原晋氏)
진씨는 남원진씨 1본(本)으로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진함조(晋含祚)를 시조로 삼고 있다. 진함조는 천문과 수학에 조예가 깊다고 소문이 나 고려 현종이 스승으로 삼았다. 그 뒤 호부상서를 지내고 진씨 성을 하사받았다. 진함조의 후손 진석이 고종 때 거란을 내쫓은 공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7. 영천이씨(寧川李氏)
시조 이능간(李凌幹)의 호는 송헌(松軒)으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1320년(고려 충숙왕 7) 원나라가 충숙왕을 토번으로 유배할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호위하였고, 왕이 죽자 재궁(梓宮, 임금의 시신을 넣은 관)을 모시고 고려로 돌아왔다. 1326년(충숙왕 13) 원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성(省)을 두려 하자, 지사사우상시(知司事右常侍)로 있으면서 이를 중지시키는 데 공을 세워 면좌당(免左堂)이라는 액호(額號)를 받았다.
1332년(충혜왕 2)에는 문하시중으로 있으면서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일등공신이 되고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영천으로 하였다.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계동에 시조 이능간의 묘가 있다. 집성촌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전라북도 남원군 주천면 용담리,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등이 있다.
8. 남원승씨(南原昇氏)
시조는 명승(明昇)이다. 중국 대하국(大夏國) 황족의 후예로 고려 공민왕 때 어머니와 함께 고려로 망명하여 귀화하였다. 황족의 자손으로 망명하였다 하여 그는 물론 자손들에게도 일체 벼슬하지 말도록 일렀다 한다. 이에 후손들은 벼슬에는 일체 나가지 않았으며, 다만 조선 고종 때에 승봉운(昇鳳雲)이 학문과 덕행이 높아 죽은 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을 뿐이다.
또한 명씨(明氏)와 승씨(昇氏)는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핏줄로써 지금까지 통혼을 하지 않는 전통을 지켜왔으며, 오늘날에는 전라남도 나주·화순 등지와 경상남도 창원·김해 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관은 창평, 남원, 나주, 금성, 밀양의 본이 있다.
9. 남원태씨(南原太氏)
남원태씨는 협계태씨의 분파이다. 시조 태맹례(太孟禮)는 태집성의 9세손이다. 태명례는 조선 단종 때 진사를 지내다가 화를 입어 1454년(단종 2) 함경북도 길주로 유배되었는데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태명례를 시조로 하고 협계태씨에서 분관하여 조상의 고향인 남원을 본관으로 하였다.
태맹례의 아들 태지(太知)가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제사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손자 태원희(太元熙)는 훈련원판관을 역임하여 훈도(訓導)를 지낸 태인국(太仁國)[만호 태원령의 아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0. 남원진씨(南原秦氏)
진씨의 시조는 진필명(秦弼明)이다. 그는 당나라 고종 때 병부시랑을 지내다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자 당나라에 원조를 요청하니 당나라의 부장(部將)이 되어 나당연합군에 참여하였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후에도 당나라에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니 태종무열왕이 태원백(太原伯)으로 봉하였다. 이가 곧 풍기진씨의 시조로, 남원진씨는 그 후에 풍기에서 분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