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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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太平里 |
영어음역 | Taepyeo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 태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소강춘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동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이곡리의 본래 이름은 배실이다. 마을의 모양이 배를 잡아 맨 것 같다 하여 처음에는 배실이라 불러오다 땅 모양이 배를 잡아 맨 것보다는 배꽃이 사방에 날려 있는 형태라 하여 배나무의 배실로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마을의 지형이 배꽃이 떨어진 이화낙지형국(梨花落地形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배실로 불려진 것으로 보이며, 지명을 한자로 옮길 때 ‘배 리(梨)’, ‘골짜기 곡(谷)’자를 써서 이곡(梨谷)이라 하였다.
태평리는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터를 잡고 집을 지으려 할 때 땅속의 바위에 천하태평(天下泰平)이라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 하여 태평촌(泰平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이곡리는 1320년경 장연변씨가 처음 터를 잡아 거주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함양오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후 함안조씨, 남원양씨 등이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 맨 처음 정착하였던 장연변씨는 현재 한 집도 남아 있지 않다.
본래 남원군 산동면 이곡리 지역으로 배실 또는 이곡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태평리, 신풍리, 이곡리, 대촌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태평리라 하고 태평리에 편입되었다.
태평리는 1580년경 남원양씨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함안조씨가 옮겨 왔으며 또 다른 성씨가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남원군 산동면 태평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태평리에 신풍리, 이곡리, 대촌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태평리라 하였다. 1924년 부절리에 있던 면사무소가 옮겨와 면소재지가 되었다.
신풍리는 1560년경 가락왕 56세손인 김해김씨가 터를 잡았으며 그 후 양씨, 박씨, 조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번성하였다. 과거 이 지역에 산동방이 있었는데 이때 방의 소재지가 지금의 신풍리이다.
본래 남원군 산동면 신풍리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태평리, 신풍리, 이곡리, 대촌리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태평리라 하고 태평리에 편입되었다. 1950년부터 마을 이름을 태평리 3구로 불러 오다가 1972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풍리로 바꾸었다.
[자연환경]
태평리 앞으로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있으며 성 밑으로는 요천(蓼川)이 유유히 흐른다. 뒤로는 웅장한 천왕봉과 연화봉(蓮花峰)이 마을을 굽어보고 있으며 앞으로는 멀리 고남산(古南山)이 솟아 있다.
[현황]
2007년 기준 면적은 435㏊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163세대에 338명(남자 168명, 여자 17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태평리의 전체 경지 면적은 4.64㎢이며 그중 밭이 0.13㎢, 논이 0.61㎢이고, 임야는 3.39㎢를 나타낸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쌀과 보리가 주요 소득원이다.
태평리는 남원시에서 동쪽으로 14㎞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19호선이 마을의 중앙을 통과한다. 이곡리는 1996년 정부 지원으로 마을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97년 경지 정리가 완료되었다.
태평리 입구에는 두 그루의 정자나무 있는데, 해마다 음력 3월 3일이 되면 농악을 울려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적으로는 산동면 태평리의 성산에 태평리 고분군(太平里古墳群)이 남아 있다. 대개 석곽묘군으로 주로 성산의 서쪽 사면에 분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