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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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海山 |
영어음역 | Choe Hae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나영 |
[정의]
조선 전기 제주안무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본관은 영주(永州). 아버지는 검교참찬문하부사 최무선(崔茂宣)[?~1395]이다.
[활동사항]
아버지 유고(遺稿)인 『화약수련법』의 비법을 전수받았으며, 1401년(태종 1) 군기시주부를 거쳐 1408년(태종 8) 경기우도병선 군기점고별감이 되어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409년(태종 9) 군기감승에 올랐고, 10월에는 화차를 만들어 태종이 임석한 가운데 해온정(解熅亭)에서 발사 시험을 하였으며 태종으로부터 말 1필을 하사받았다. 1424년(세종 6) 12월에도 군기판사로서 세종의 임석 하에 광연루(廣延樓)에 나아가 화포 발사 연습을 주관하였다.
1425년(세종 7) 군기감사 재임 중 정해진 수 이상을 군사를 거느렸다는 탄핵을 받았다. 1431년(세종 13) 6월 좌군동지총제가 되었고 10월 오랜 군기감 근무 시 옳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여 탄핵받았지만, 세종의 두터운 신임으로 허락되지 않았고 오히려 1432년(세종 14) 공조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1개월 후 판경성군사(判鏡城郡事)로 전보되었을 때에도 세종은 그가 외직으로 나갈 경우 군기감의 업무가 부실하여진다 하여 중추원부사에 임명하였다.
1433년(세종 15)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崔潤德)[1376~1445]과 함께 압록강의 한 지류인 파저강 토벌 작전에 참전하였을 때에도 군기(軍機)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세종은 용서하였다.
1434년 10월 이붕(李鵬)의 후임으로 제주안무사에 부임하였다. 1434년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과 방어소(防禦所)에서 사용할 무기를 중앙에서 공급받아 국방에 힘썼으나 1435년(세종 17) 관부가 소실되어 모든 문적이 타버리기도 하였다.
그 후 정청(政廳)을 건립하고 홍화각(弘化閣)이라 편액하고, 또 우정당(郵政堂)·찬정당(贊政堂)·영고(營庫)·약고(藥庫)·마구(馬廐)·침실·종루 등을 신축하였다. 1435년(세종 17) 제주향교를 중건하였으며, 예조참의 고득종(高得宗)[1388~1460]으로 하여금 「홍화각기(弘化閣記)」를 짓게 하고 편액을 쓰게 하니 모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제주에서 가지 하나에 6개 달린 석류와 원숭이·노루 한 쌍을 진상하였으며, 제주에 책이 귀한 것을 보고하여 『대학』·『중용』·『논어』·『맹자』·『시경』·『서경』·『예기』·『역경』·『춘추』·『성리대전』을 제주향교에 하사받도록 하였다.
최해산은 전수받은 화약 수련 비법과 타고난 재능으로 화약 병기를 비롯한 군 장비 보강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제주안무사 재임 중 교육·농사·마정(馬政)·군정 등 온갖 분야를 정비하고 확립시켜 명성 높은 목민관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