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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 여산송씨 유허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1370
한자 烈婦礪山宋氏遺墟碑
영어음역 Yeolbu Yeosan Songssi Yuheobi
영어의미역 Monument for Virtuous Lady Song from Yeosan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감협 선과장 옆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홍순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허비
건립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관련인물 여산송씨
높이 93㎝
너비 44.5㎝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 감협 선과장 옆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조선 후기 송씨 부인의 행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

[개설]

열부 여산송씨 유허비는 조선 후기 봉개동에서 살았던 양기석의 처 송씨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이다.

송씨 부인은 남편이 괴질로 죽은 뒤에도 정성껏 시가 어른을 모시다가 아들이 죽자 목을 매어 죽었는데, 제주목사가 이 일을 전해 듣고, “사열(死烈)이야말로 처음 듣는다.”며 이를 불쌍히 여겨 상을 내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유허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건립경위]

양기석의 처 송씨 부인의 본관은 여산으로, 결혼 후 남편이 종숙(從叔)의 양자로 가게 되어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근검으로 집을 꾸리어 두 시어머니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어 부녀자가 할 바를 다하였다.

1886년(고종 23) 여름에 괴질이 번져 남편이 죽자, 송씨 부인은 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두 시어머니와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예전과 다름없이 정성을 다하여 두 시어머니를 모셨다.

그런데 남편의 3년 상을 지내고 얼마 후 갑자기 아들이 죽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송씨 부인의 죽음에 놀라고 슬퍼하여 그 유허에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형태]

비신의 너비는 44.5㎝이고 높이는 93㎝, 두께는 26㎝이다.

[금석문]

비석의 앞면에는 “열부여산송씨유허(烈婦礪山宋氏之遺墟)”라고 쓰여 있고, 뒷면과 오른쪽 면, 왼쪽 면에는 죽산(竹山) 안동택(安秉宅)이 지은 송씨 부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비석에 쓰여 진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부의 성은 송씨인데 본은 여산이다. 중세에 제주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증조의 이름은 송계조(宋繼祚), 할아버지는 송인원(宋仁元), 아버지는 송민환(宋敏桓)이었다. 어머니 청주한씨 밑에서 철종 임술년(1862) 8월 28일에 태어났다.

(봉개동) 양기석에게 시집 간 뒤 남편이 종숙(從叔) 댁에 양자를 들어 생가와 양가의 시어머니 두 분을 모시게 되자 가난한 중에도 두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다.

병술년(1886) 여름 전염병으로 남편이 앓게 되자 낮에 약을 쓰고 밤에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였으나 그 해 세상을 떠났다. 열부 송씨는 슬픔을 참고 남편의 장례를 치른 다음 세 살 난 아들을 훌륭히 키워 달라는 남편의 유언을 따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살아가던 중 무자년(1888) 10월에 다시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열부 송씨는 이제야말로 집안의 대가 끊기고 말았음을 통탄해하다 그 해 11월 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네 이웃과 일가친척이 이를 경탄하여 대성통곡하였다. 목사가 이 소식을 듣고 ‘사열(死烈)이야말로 처음 듣는다’며 이를 불쌍히 여겨 상을 내렸으며, 나라 안의 변고로 임금께 이를 아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양자 양재윤이 진주강씨에게 장가를 들어 양성삼·양성칠 두 아들을 낳으니 이로부터 대를 이어가게 되어 집 안의 적막을 벗어나게 되었으나 강씨마저 과수가 되니 어찌 한이 없으랴마는, 아들이 잘 자람에 힘을 얻어 절개를 지키며 집 안의 명성을 이어가니 이제부터 하느님이 도움을 주심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됨이 아닌가 한다.

아! 슬프도다. 부인의 사열(死烈)이야말로 세상에 드문 일로서 한 부인이 사열함은 후세 사람들이 감탄하여 추모할 것이고 이를 길이 빛내고 열부의 행적을 묻혀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행적을 전하노라.”

[현황]

유허비를 세운 장소는 당시 송씨 부인이 살았던 집터라고 전하는데, 후손으로는 2005년 현재 봉개동에 살고 있는 증손 양한구·양명구·양병구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 중기 이후 결혼한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남편의 묘를 지키며 수절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수절을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칭송하고 장려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으면 나라에서 그 집안에 정문(열녀문)을 내려 여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열부 여산송씨 유허비에는 조선 후기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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