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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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達嶺戰鬪 |
영어음역 | Bakdaljae Jeontu |
영어의미역 | Bakdaljae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구완회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2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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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217년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김취려|최원세 |
[정의]
1217년 박달재 부근에서 벌어진 고려군과 거란군의 전투.
[역사적 배경]
고려는 국초부터 요(遼)나라를 세워 한때 중국의 북부 지역을 지배하던 거란족을 적대시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거란족의 침입을 당하였으나 그때마다 물리쳤다. 1217년(고종 4) 봄 3만 요의 대군이 쳐들어왔고, 그 한 갈래가 동쪽으로 남하하여 철원·춘천을 거쳐 원주마저 장악하였다. 조정에서는 최원세(崔元世)를 중군병마사, 김취려(金就礪)를 전군병마사로 삼고 병졸과 승군을 동원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경과]
1216년(고종 3) 여름에 3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해 온 거란족이 이듬해에는 오늘날의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7월 초에 이르러 중군병마사 최원세, 전군병마사 김취려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충주·제천 사이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세를 크게 반전시켰다.
이때 고려군은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행군하여 원주 법천사(法泉寺)를 지나 충주 쪽으로 나아가 다시 강을 건너 북상하여 독재[禿岾] 부근에서 김취려의 작전에 따라 병력을 나누었으며, 이튿날 맥곡(麥谷)에서 거란군을 협공하여 300여 명을 베고 진격하였다. 이때 제천의 강물에는 적의 시신이 가득 떠내려갔다고 한다.
사흘 후에도 고려군은 김취려의 전략을 좇아 박달재에 먼저 올라가 주둔하고 있다가 뒤늦게 고개를 오르는 거란 군대를 맞아 힘껏 싸워 적을 크게 대패시켰으며, 이때에 거란군은 늙거나 아직 어린 남녀와 병기·짐수레 등을 남기고 도망쳤다고 한다.
[결과]
박달재에서 패한 거란군은 동쪽으로 달아나 대관령을 거쳐 여진의 땅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항복한 거란족 사람들을 공전마을에 정착시켜 살게 했는데 이곳이 훗날 거란장터라고 일컬어진 곳이다.
[의의와 평가]
제천 일대에서 벌어진 박달재 전투는 남하하려는 거란군의 의도를 좌절시킨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이후 거란족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고려군에게 쫓기면서 동쪽으로 도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