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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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就礪 |
영어음역 | Gim Chwiryeo |
이칭/별칭 | 위열(威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고려 후기 제천에서 거란병을 크게 무찔러 격퇴한 무신.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신라 경순왕의 일곱째 아들인 언양군(彦陽君) 김선(金鐥)의 후손 예부 시랑(禮部侍郞) 김부(金富)이다.
[활동 사항]
김취려(金就礪)[1172~1234]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에서 태어났다. 음관(蔭官)으로 정위(正尉)에 임명된 뒤 동궁 위(東宮尉)를 거쳐 장군(將軍)으로서 동북계(東北界)를 진압한 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16년(고종 3) 거란 군사가 가족들을 이끌고 의주(義州)·영주(寧州)·삭주(朔州) 등지에 쳐들어와 식량을 약탈하고 그곳을 생활 근거지로 삼으려 하자 후군 병마사(後軍兵馬使)로서 그들을 크게 물리쳐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전군 병마사(前軍兵馬使)가 되어 충청도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병을 크게 무찔러 격퇴하였다. 관련 내용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정축 4년조에 전한다. 1218년(고종 5) 거란이 다시 침입하자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원수(元帥) 조충(趙冲)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고, 이듬해에 강동성(江東城)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거란 병을 공격하기 위해 몽골에서 군사 1만 명과 동진(東眞)에서 2만 명을 보내오자 몽골·동진과 연합하여 거란 병을 물리쳤다.
또한 1219년(고종 6) 의주 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知)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더불어 평정하여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김취려는 많은 공을 세워 1221년(고종 8) 추밀원 사 병부 상서 판삼사사(樞密院使兵部尙書判三司事)가 되었고, 참지정사 판호부사(參知政事判戶部事)를 거쳐 1228년(고종 15) 수태위 중서 시랑 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약하였으며, 군사를 통제하는 데 엄격하고 공정하여 사졸들이 추호의 범함도 없이 존경하였다. 일찍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취려의 업적은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 산15번지 화장산(花藏山) 기슭에 있으며,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위열공 김취려의 묘로 지정되어 있다. 묘비명은 선조 때 문신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썼다. 묘소 아래 능곡마을 뒤에 태지유허비(胎地遺墟碑)가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