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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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아홉 구비가 진 냇가에 터를 잡은 마을이므로 구론 또는 구곡(九谷)이라 하였다가 구룡(九龍)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九谷里[구실]’로 수록되어 있다. 조선 말 청풍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자감동[일명 잘개밋골]·장터[일명 장터거리, 새장터거리]·한내[일명 한천(寒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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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적덕리에 있는 약수터. 남산 약물계가 있는 마을을 약물개마을이라 부르는데, 마을에 있는 샘이 약물의 효험을 갖고 있다 하여 약물개[약물게, 약물계, 약물께]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약물개마을은 일명 약수동이라고도 부른다. 약물개마을이 자리한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적덕리는 동북쪽 및 동남쪽으로는 구룡리와 맞닿아 있고, 서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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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붉은 흙을 캐내었다고 하여 단돈(丹頓)이라 하였다. 군사 주둔지였으므로 단둔리(丹屯里), 마을 주변에 여러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져 숲거리라고도 하였다. 조선 말 청풍군 수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수하면 단돈리가 되었고, 1929년 청풍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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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한국지명총람』에는 풍수지리상 장군대좌혈(將軍大座穴)이 있어 대장이 또는 대쟁이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 말 제천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가곡·고마창·금곡·둔전곡·천령곡 등을 통합하여 성산면 대장리가 되었고, 1917년 금성면에 편입되었다. 1980년 제천읍이 분리되어 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제원군 금성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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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동쪽에 막을 친 것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동막’은 다른 지역에도 흔히 보이는 지명이므로 한자 지명에 맞춘 인위적 설명에 불과하다. 조선 말 제천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노항·막대동·평촌·저곡·기동 등을 통합하여 성산면 동막리가 되었고, 1917년 제천군 금성면에 편입되었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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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살구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므로 ‘살구꽃 방(芳)’자와 ‘흥할 흥(興)’자를 써서 방흥리라 하였다. 1700년경 충주 석씨(忠州石氏)가 방랑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즉 한강 상류에서부터 한 송이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강물이 파도쳐 흐른다는 의미에서 ‘방흥’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마을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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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면위산(免危山) 밑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며뉘산, 면산이라 하였다가 부산(婦山)으로 바뀌었다. 면위산은 풀이하면 위험을 면하는 산, 곧 피난 터를 뜻하는데 음이 며누리산으로 바뀌면서 마을 이름도 부산이 되었다. 옥녀와 관련된 옥녀봉의 전설로 말미암아 ‘며느리 부(婦)’를 써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1914년 제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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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전설에 따르면 조선 선조 때 해주 오씨 오주해(吳柱海)가 단양 부사로 부임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금성면 활산리로 피난 가던 중 사오리에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오주해는 증조부의 호인 사오당(査伍堂)을 따서 마을 이름을 사오륜(査伍倫)이라 하였고, 여기에서 사오리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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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충주댐 수몰로 물에 잠긴 청풍토성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성안·성내·성두둑이라 하였다. 작성산에는 북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둘러싼 작성산성이 있다. 달리 까치성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 청풍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웅암·주포·은행정 등을 통합하여 제천군 금성면 성내리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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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디 이름은 사리방리(沙里防里)의 모음 변이형인 사린뱅이였는데 살인과 소리가 같고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자주 일어나 양화리로 고쳤다. 조선 말 제천군 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심곡리·양지말·음지말 등을 통합하여 성산면 양화리가 되었고, 1917년 금수면과 통합되어 금성면 양화리가 되었다. 1980년 4월 1일 제천읍이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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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 말 옥천 전씨(沃川全氏)가 터를 잡고 오산(伍山)[일명 오봉(伍峰)]이 있어 경관이 빼어나므로 마을 이름을 오미(五美)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오매 또는 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디 진목리를 아랫오미, 오산리를 웃오미라 하였는데 인구가 늘어나 분리하여 웃오미에 있는 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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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 말 옥천 전씨(沃川全氏)가 터를 잡고 오산(伍山)[일명 오봉(伍峰)]이 있어 경관이 빼어나므로 마을 이름을 오미(五美)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마을 뒤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기 때문에 오매 또는 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본디 진목리를 아랫오미, 오산리를 웃오미라 하였는데 인구가 늘어나 분리하여 웃오미에 있는 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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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월굴리 중심 마을인 송내[일명 송천] 북쪽에 있는 법개의 지형이 달 모양이고 마을 입구에 동굴이 있어 ‘달 월(月)’자와 ‘굴 굴(窟)’자를 써서 월굴리라 하였다. 법개 뒷산에는 법개사가 있었다고 전해 온다. 조선 말 청풍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높은다리·배나무들·석동골 등을 통합하여 제천군 금수면 월굴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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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장선리 장선계곡에 있는 협곡. 장선협곡은 청풍팔경 가운데 제3경, 신(新) 청풍팔경의 제7경에 해당하는 경승지이다. 장선협곡은 병풍바위라고 하는 바위가 줄을 이어 벼랑을 이루고 있고, 이 때문에 줄병바위라고도 부른다. 장선협곡에서 청풍호반이 보이고, 북동쪽에 있는 국사봉 능선에서는 울창한 송림을 굽어볼 수 있어 예부터 청풍팔경의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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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긴 골짜기 안에 터를 잡은 마을이므로 장선이라 하였다. 긴 골짜기에 크고 작은 열두 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으므로 열두장선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이곳 주민들이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 청풍군 수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수하면 장선리가 되었고, 1929년 10월 14일 청풍면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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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에 속하는 법정리. 예전 마을에서 붉은 흙이 많이 났다고 하여 적덕(赤德)이라 하였다가 뒤에 적덕(積德)으로 바뀌었다. 1914년 경에 편찬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적덕(積德)’으로 수록되어 있다. 마을이 주변 골짜기 넓은 터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골말[일명 곡촌]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말 청풍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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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고려 말 옥천 전씨(沃川全氏)가 입향하여 터를 잡은 이래 마을 주변 오봉에 참나무가 많아 가을 풍치가 빼어나므로 진목 또는 아랫오미라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진목리의 자연 마을인 새터말에도 참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붙여졌다는 말도 전한다. 조선 말 청풍군 수하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제천군 수하면 진목리가 되었고,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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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하수경(河秀京)은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을 좇아 의진에 투신하였다. 우선봉으로 활약하다가 충주 금가 전투에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9년 만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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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본래 마을에 큰 돌이 있어서 한똘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변하여 황뜰, 황석(黃石), 황도(黃道), 황두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수몰 이전 마을 입구에 우둔하고 힘이 센 삼형제가 옮겨 세웠다는 선돌이 있었는데, 이 돌을 황돌 또는 황석이라 불렀고, 돌 이름을 따라 마을 이름도 바꾸게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또한 들판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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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에 속하는 법정리 마을 뒤에 큰 산이 있으므로 후산(後山)이라 하였다. 지명과 관련한 전승이 있는데, 1658(효종 9) 청풍 부사 이후산(李後山)[1597~1675]이 부임하여 마을 이름이 자기 이름과 같다 하여 두산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 뒤로 마을에 재난이 겹치게 되자 부사의 이임과 동시에 마을 이름을 후산으로 다시 바꾸었고, 그 후 마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