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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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晉鎬 |
영어음역 | Mun Jinho |
이칭/별칭 | 문석호(文碩鎬),국원(國元),석전(石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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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1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
성격 | 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강성(江城)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강성(江城). 초명은 문석호(文碩鎬), 자는 국원(國元), 호는 석전(石田). 의안공(毅安公) 문득준(文得俊)의 후손으로, 연강재(練江齋) 문후(文後)[1574~1644]의 8세손이다. 6대조 직하재(稷下齋) 문헌상(文憲商) 때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이거하였다. 고조할아버지는 사암(思菴) 문기팔(文起八)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회당(晦堂) 문종익(文宗益)이며, 할아버지는 벽암(碧巖) 문경삼(文景參)이다. 아버지는 신묵재(愼黙齋) 문재백(文在伯)이고, 어머니는 강사윤(姜師贇)의 딸 진양 강씨(晉陽姜氏)이다. 전처는 이윤모(李潤模)의 딸 재령 이씨(載寧李氏)인데, 후사가 없었다. 후처는 정구용(鄭玖鎔)의 딸 연일 정씨(延日鄭氏)이며, 그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문진호(文晉鎬)[1860~1901]는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감독하거나 권면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에 힘썼으며 부모의 명을 거스르지 않았다. 20~23세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였으며, 백형과 중형마저 일찍 여의었다. 그리하여 부모와 형제를 잃은 슬픔에 병을 얻었으나, 분발하여 병을 무릅쓰고 학문에 더욱 매진하였다.
당대의 석학인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1824~1904],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1837~1905], 산석(山石) 김현옥(金顯玉)[1844~1910],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 회산(晦山) 이택환(李宅煥)[1854~1924], 수당(修堂) 최경병(崔瓊秉)[1865~1939], 송와(松窩) 최제태(崔濟泰) 등과 두루 교유하며 학문을 강마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 『석전유고(石田遺稿)』 3권 1책이 있다.
[묘소]
묘소는 처음 하동의 마안산(馬鞍山) 아래에 있었으나, 후에 이명산(理明山) 아래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재실(齋室)을 서당(書堂)으로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는데, 사후에 유생들이 문진호가 강학하던 곳을 대전재(大田齋)라 이름하고 유계(儒契)를 조직하여 그의 학문과 행실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