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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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雙磎寺眞鑑禪師塔碑 |
영어의미역 | Stele for Buddhist Priest Jingamseonsa of Ssanggye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곽승훈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2년 12월 20일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국보 제4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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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국보 재지정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850년 |
건립 시기/일시 | 887년 |
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
성격 | 탑비 |
관련 인물 | 진감선사 |
재질 | 화강암[귀부와 이수]|흑대리석(비신)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363㎝[탑비 높이]|202㎝[탑신 높이]|1m[폭]|23㎝[두께] |
소유자 | 쌍계사 |
관리자 | 쌍계사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 진감선사(眞鑑禪師)의 탑비.
[개설]
진감 선사는 774년(혜공왕 10)에 태어나 불법을 익혔으며, 804년(애장왕 5) 당나라에 들어가 창주(滄州)의 신감선사(神鑑禪師)에게 출가하였다. 10년 동안 당나라에서 공부한 뒤 830년(흥덕왕 5)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상주와 지리산에서 남종선과 범패 음악을 널리 전하여 신라는 물론 한국의 선종 사상사에 영향을 끼쳤다.
[건립 경위]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진감 선사가 입적하고 36년이 지난 뒤에 조성되었다. 처음 입적하였을 때 문성왕이 탑비를 세우려 했으나, 부도와 비를 세우지 말라는 뜻에 따라서 탑비를 세우지 않았다. 그 뒤 문하 제자와 내공봉 양진방, 숭문대 정순일이 비석을 세워줄 것을 아뢰니, 헌강왕이 진감 선사라 추시(追諡)하고 대공영탑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그런데 비석을 세우기도 전에 헌강왕이 세상을 뜨자 정강왕이 계승하여 일을 추진하였다. 이때 정강왕이 계곡의 시냇물이 합쳐지는 것을 보고 옥천사를 쌍계사로 바꾸도록 하였다. 탑비는 888년(정강왕 2) 7월에 건립되었는데, 헌강왕도 이 달에 승하하였다. 비문은 헌강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최치원(崔致遠)이 작성하고 글씨도 직접 썼다.
[위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 대웅전 바로 앞에 있다.
[형태]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거북받침돌[귀부], 비신 및 이수(螭首) 형태의 덮개돌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 탑비의 높이는 363㎝, 탑신의 높이는 202㎝, 폭 1m, 두께 23㎝이다. 거북받침돌과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으로 꾸며져 있고 등은 6각의 무늬가 홑겹으로 크게 표현되었다. 대체로 통일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거북받침돌의 중앙에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 구름무늬가 있고 위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려 있다. 이수형의 덮개돌에는 4면에 여의주를 놓고 서로 다투는 용이 힘차게 조각되어 있다. 덮개돌의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에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글자는 2.3㎝, 글자 수는 2,423자이다. 비문을 새긴 이는 승려 환영(奐榮)이다.
[금석문]
비문은 크게 서문과 그 내용을 정리한 명으로 나누어진다. 서문의 서론격인 도입부는 혜소의 선종 사상이 갖는 경향을 최치원이 파악하고 그 의미를 밝힌 것이다. 여기서 최치원은 유교·불교 사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본 내용에서도 노장 사상이 드러나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가 표방하는 이치는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하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 최치원은 진감선사가 그러한 경지에 있는 뛰어난 인물임을 부각하였다.
본론 부분은 진감선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기록하였다. 진감 선사는 810년(헌강왕 2)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다시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 더 도를 닦았다.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상주 모악산 장백사에서 선을 가르쳤다.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민애왕이 혜소라 시호를 내리고, 가르침을 구하고자 서울[경주]로 거듭 초빙하였으나 거절하고 가지 않았다.
지리산 화개곡에 들어가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유지(遺址)에 절을 세우고 선(禪) 사상을 가르쳤으며, 다시 남쪽의 넓은 벌판으로 옮긴 뒤 옥천사(玉泉寺)를 세웠다. 850년(문성왕 12)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아울러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 사실과 탑비의 건립 과정 등도 전하고 있다.
[현황]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우수한 문화재로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오래된 까닭에 비신의 일부분이 마멸되어 있으나 여러 탁본과 판본이 전하고 있어 비문 내용은 완전하게 알려져 있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파손된 부분이 있고 균열도 심하다. 비신의 일부를 철재로 보정하여 보수해 놓은 상태다.
[의의와 평가]
문장가로 유명한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짓고 아울러 전서의 제액과 비문의 글씨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서체는 해서(楷書)이다. 최남선(崔南善)은 ‘구양순의 골격에 안진경의 살을 붙인’ 특색 있는 글씨로 평가하는 등 최치원의 예술적 경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최치원의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된 것으로서, 최치원이 귀국한 직후의 사상적 경향을 알 수 있는 사료로서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