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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79
한자 光州國樂-歷史-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명진

[정의]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전개된 국악의 전승, 발전 내력과 자취.

[개설]

광주광역시는 호남을 대표하는 중심 도시이며, 경제·행정·교육의 중심이자 국악·미술·음식 등 예술,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근대도시로 급성장한 광주 지역에 대규모의 사람들이 모여들자 광주는 상업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경제적 추이를 따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국악인들 역시 문화 소비층이 많은 광주로 모여들게 되었고, 점차 양명사, 광주극장과 같은 근대식 공연장이 건립되었다. 또한, 국악 인재 양성소이자 국악인들의 거점으로 활용된 광주권번, 사설 국악학원이 형성되었고, 점차 시립국악원, 국악고등학교, 전남대학교 국악과 등 국공립 단체·기관도 설립되었다. 이러한 경제적·문화적 양상은 광주에 수많은 명인·명창을 끌어들이고 또 실력 있는 인물들을 배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 말]

광주의 국악은 1906년 궁내부 협률사 해체 후 많은 명인·명창들이 낙향하여 단체를 설립해 활동하고,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비로소 정착하고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특히, 20세기에 이르러 급성장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지역에 판소리 전승을 가능하게 했던 문화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 편을 보면, 광주의 군병(軍兵)에 장악원이 있었고, 악생 1명, 악생보 6명, 악공보 18명이 소속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속 음악인들의 신분은 양민인 악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천민 신분이었다. 특히, 이들은 무속 집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이러한 까닭에 지방에 따라 장악원을 악공청, 재인청, 신청, 무부청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광주에서는 세습무(世襲巫)가 활발하게 활동했고, 지금도 여전하다. 세습무들은 대대로 무업에 종사해 온 전문 예술인들로, 음악·예능 등의 역량이 뛰어났다. 게다가 광주가 대도시화하면서 인근 지역의 장악원에 속해있던 예인들이 광주로 모여들었음은 얼마든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조선 중기 전후만 해도 전라도에 무려 5만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신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지방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각종 연향(宴享)과 17세기 등장한 풍류방 문화가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지방의 수령들이 개최한 양로연, 사신 영접, 신관도임(新官到任) 축하연을 비롯해 문인들의 기로연, 회갑연 등의 각종 연향에서 가·무·악이 연행되었고, 이들 연향은 17세기 새로운 향유층으로 등장한 중인들에게 다양한 공연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중인 출신의 가객과 율객을 중심으로 향유하는 풍류방 문화가 양산되었고, 풍류방을 통해 정악이라는 음악 문화가 등장하여 현재까지 국악의 중요한 갈래로 전승되고 있다. 풍류방 음악은 크게 성악과 기악으로 나뉘는데, 성악은 가곡·시조·가사이고, 기악은 줄풍류[현악기로 연주하는 풍류]로 알려진 영산회상(靈山會相)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풍류방은 국악을 향유하는 풍류객들의 모임을 구성하고, 또 규합하는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이후에는 풍류방이 국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사람들을 지칭하는 전범위적 의미로 사용된다. 물론 19세기 풍류와 판소리의 연관성은 『금옥총부(金玉叢部)』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집 편찬자이자 가창자인 안민영(安玟英)[1816~1885?]이 전국 곳곳을 다니며 지역의 풍류객과 예술인, 기생 등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그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을 통해 판소리가 풍류와 함께 잔치, 놀이 등에 자주 향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풍류객들은 판소리를 자주 접했고, 또 이해 수준도 높았다. 하지만 광주와 직접적으로 관련하여 『금옥총부』에 나오는 내용으로는 유일하게 광주의 기생으로 소개된 설향(雪香)인데, 설향은 활쏘기[射藝]에 뛰어난 것으로만 소개되어 있어 그 예술적 재량을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담양의 기생 능운(凌雲)이 가무(歌舞)에 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 능운이 죽자 "호남 풍류는 이제 끊어졌다."라고 탄식하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호남 풍류'에 대한 언급이다. 호남 풍류에 대한 예술적 인식과 풍류를 향유하는 양상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 20세기에는 '광주 풍류'를 형성하였다. 20세기 후반 광주의 율객으로는 안치선, 조창훈 등이 거론된다.

결과적으로 광주에 국악이 발전하고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명인·명창들이 저변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광주에 정착하고 또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광주에 국악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있었다.

[20세기 초]

20세기 초반은 광주 국악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광주가 서편제 판소리의 중심 도시로 거대한 계보를 형성하게 된 시점이기 때문이다. 궁내부 협률사 폐지로 협률사에 소속된 많은 명창과 명인이 전국 각지로 흩어졌고, 광주·전라남도 지역에는 김창환[광주]·김채만[광주]·정응민[보성] 등이 낙향하였다. 이들의 낙향은 광주·전라남도 지역의 판소리 전승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오늘날 광주·전라남도의 판소리 문화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중 김창환·김채만은 광주 지역에 정착하여 판소리의 저변을 넓히고 깊이 뿌리내렸다. 특히, 광주 지역에서 1907년 최초로 설립된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김창환·김채만·강용환·유성준·박지홍·김봉학 등 50여 명의 전라도 출신 명창·명인들을 규합한 대규모 협률사였다. 그 후 김창환협률사에서 활동했던 김채만의 제자들이 모여 광주협률사를 설립하였다. 이 두 협률사는 이후 설립되는 광주·전라남도 지역의 다양한 협률사의 모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김창환·김채만은 박유전으로부터 전승된 서편제에 기반을 둔 명창들로, 이후 광주·전라남도 지역에 서편제 판소리의 집중적인 전승 양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판소리 명창들이 주축이 된 협률사 활동의 중심은 당연히 판소리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나, 본래 협률사 단체는 판소리 외에도 궁중무용·민속무용·줄타기·땅재주 등 전통연희 전반을 공연하였다. 따라서 협률사의 활동은 광주에 다양한 국악 분야가 전승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전후 광주 국악의 전승 활동에는 광주권번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광주권번은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국악 교육기관이었다. 협률사 활동을 하던 명인·명창들이 권번의 강사로 정착하고, 그 밑에서 많은 명인과 명창이 양성되었다. 송만갑·임방울·정광수·박동실 등이 소리 강사, 가야금과 거문고 선생으로는 박석기, 무용 선생으로 이대조·조앵무·이매방 등이 활동한 바 있다.

광주권번은 학예부를 설치하여 오늘날 국악으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가·무·악을 교육하였다. 과목은 창[판소리]을 비롯해 시조·가야금·춤·민요 등 국악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고, 여기에 예절·한문·일본어까지 학습하였다. 즉, 권번 소속 기생은 종합적인 소양을 갖춘 예능인으로서 육성되었다. 광주권번 출신 중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남도판소리서편제의 보유자로 인정받은 안채봉의 경우에는 판소리보다 검무, 살풀이춤의 명무로 이름을 알렸다.

광주권번 예기들의 특기로는 판소리가 가장 주목된다.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에 소개된 광주권번 예기 7명 중 5명은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기생이다. 특히, 광주권번에는 당대의 유명한 명창들이 창악 강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명창으로 박동실·정광수가 있다. 정광수박동실광주권번에서 오랫동안 소리 강사로 활동하면서 많은 여류 명창을 육성했는데, 장옥순·장월중선·김소희·안채봉·박송희·한애순·박화선·정미옥 등이 있다. 이들 여류 명창 중에는 후에 국가 및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로 활동하며 판소리 보급과 전승에 기여한 이가 많다.

무엇보다 박동실의 소리는 '광주판 서편제'라고 불릴 만큼 광주 지역에 미친 영향력이 컸다. 판소리 연구자 최동현은 "박동실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전라남도 지역의 판소리는 광주판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보성소리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김창환의 소리는 전승이 이미 끊어지다시피 했으며, 정정렬의 소리는 전라남도를 떠난 지 오래였다. 따라서 박동실의 광주판이 전라남도 지역의 판소리를 대표하고 있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 영향력이 컸던 만큼 박동실의 월북은 광주 지역 판소리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월북 명창의 제자들은 대부분 다른 유파의 소리로 전향했고, 한애순이 마지막까지 박동실의 소리를 전승했으나 한애순 사망 후에는 거의 맥이 끊어지는 위기에 처하였다.

[한국전쟁 이후~1970년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도시는 피폐해졌고 문화예술은 위축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광주의 국악인과 국악 애호가들은 광주 국악을 보전하고 전승해 나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62년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 1974년 광주시립국악원 등이 설립되었다.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는 광주의 명인·명창을 규합하고 지역 국악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행정 개편으로 전라남도와 광주가 분할되는 1988년까지 광주·전라남도의 국악을 수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광주시립국악원은 광주에서 처음 설립된 시립 국악 단체로, 1974년 6월 광주시민회관[사직동] 내에 개원했고, 1987년에 폐원되었다. 광주시립국악원에는 부설 민속예술학원이 있었는데, 이를 통해 광주시립국악원이 광주 지역 국악 교육이 이루어졌다. 시립국악원에서는 정광수·한애순·박옥심[박춘성]·안채봉 등 명창들이 강사로 활동했으며, 시조·가야금·판소리·무용·피리·대금 등의 종목을 가르쳤다. 초창기 시립국악원은 창을 배우는 사람이 100여 명이 될 정도였다. 광주시립국악원은 광주 지역 최초의 관립 국악 교육기관이라는 점과 관립 국악원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설립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국악 사설 학원들의 등장이다. 1950~1960년대 광주국악원, 광주국악강습원, 전남민속예술학원, 호남국악원, 전남국악원 등 다양한 사설 학원의 형성은 광주 지역 국악 전승에 활기를 가져왔다. 특히, 1951년 창립된 광주국악원광주권번의 후신으로, 한국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국악인들을 규합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광주국악원에서는 판소리·춤·기악 등을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정광수가 강사로 활약했던 전남민속예술학원과 공대일이 강사로 활동한 호남국악원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두 학원의 경쟁은 당시 광주 지역의 판소리 거두였던 정광수공대일의 경쟁이기도 하였다. 1950년대 광주 지역에서 국악을 배웠던 사람 중 정광수공대일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공대일에게 학습한 여성들은 여성국극단을 따라나선 이가 많았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이 시기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단은 광주의 극장가를 통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50년 중반부터 1960년 초에 이르기까지 광주에는 광주극장, 동방극장을 비롯해 약 8개의 극장이 존재하였다. 이는 광주 지역에서 많은 협률사가 활동했던 것이 극장의 활성화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극장의 발달은 각종 공연 단체를 유입하는 통로가 되었고, 국극·악극·가극·판소리 등을 공연하는 단체들이 끊임없이 광주를 찾아왔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이들 단체의 공연은 약 93건에 달한다.

여기에 더해 1970대에는 광주 지역에 새로운 유파의 판소리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바로 정응민이 전승한 보성소리와 강산제이다. 정응민의 제자 정권진·조상현·성우향·성창순이 각종 큰 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받게 되면서 그들의 스승인 정응민에 대한 위상이 함께 높아졌다. 특히, 조상현·성창순은 광주시립국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의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그간 박동실의 영향으로 침체되었던 광주의 판소리 전승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현재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명창 중 상당수가 정응민의 소리를 전승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보유자로는 한해자·이은하·이임례·정춘실 등이 있다. 한국판소리보존회 광주지부장인 주소연을 비롯해 마미숙·양신승·이정화·박춘맹 등이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의 제자들이 광주에서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있다. 2020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가 된 윤진철도 오랫동안 광주에서 활동하였다.

[1980년대 이후]

1980년대는 광주에 있어서 큰 변화기이다. 전라남도의 일부 지역이 광주로 편입되면서 광주의 행정 지역 범위가 외곽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1986년에는 광주시광주직할시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와 행정이 분리되고, 문화예술계도 광주와 전라남도의 역할이 구분되었다. 이로 인해 1962년 광주·전라남도의 국악인들이 뜻을 모아 설립하여 오랫동안 활동해 오던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가 광주지회와 전라남도지회로 분리되었고, 광주에 터를 두고 활동하던 예술단체도 시와 도 소속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구분은 지방자치기관인 광주의 대도시로서의 독자성을 확립한 것이지만, 광주·전라남도의 국악인들을 지역적으로 양분하면서 그동안 돈독했던 국악 전승의 기반을 흔들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1980년대는 광주 국악의 독립과 정체성 바로 세우기가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광주광역시에서 운영하는 시립예술단체의 창립이다. 시립예술단체의 창립으로 국악인들은 안정적으로 다양한 예술 창작 활동도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광주광역시 시립예술단체 설치 조례」[1989. 10. 18.]에 따라 광주광역시립교향악단, 광주광역시립국극단, 광주광역시립무용단, 광주광역시립합창단 등의 단체가 발족되었고, 1990년 광주광역시립국악관현악단이 추가되었다.

광주시립예술단체 중 국악 관련 단체는 시립국극단과 시립국악관현악단이다. 시립국극단은 지방에 있는 최초의 관립 국극 중심 단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시립국극단의 창단은 광주의 판소리 전승자들에게 새로운 활동 무대를 제공하였다. 시립국극단은 최초 창립 때 판소리 창자 13명, 고수 2명으로 출범했고, 이후 단체 정원이 최대 50명까지 확대되었다. 2017년에는 광주시립창극단으로 개칭하여 활동하고 있다. 1989년 창단 공연 「창극 놀보전」을 시작으로 판소리를 각색한 「창극 심청전」[1990], 「창극 대춘향전」[1991], 「창극 열사 유관순」[2009], 「창극 안중근」[2010], 「오월 광주, 소리愛 춤추다」[2011] 등 창작 창극과 가·무·악 공연까지 수백여 가지의 공연을 선보였다.

1980년대 광주 국악의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한 것은 판소리 명창 임방울(林芳蔚)[1904~1961]의 재조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대중에게 사랑받고 널리 알려졌던 임방울을 광주 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국악인으로 내세움으로써 광주 지역은 판소리의 성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임방울을 기념하기 위해 임방울국악진흥회가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주요 사업으로는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임방울국악제 전국대회는 1997년에 시작되었고, 대통령상을 유치하고 있는 큰 대회이다. 판소리를 비롯해 농악·기악·무용·시조·가야금병창·퓨전판소리 부문 등 다양한 경연이 열리고 있으며, 국악 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음으로 광주광역시가 보호·관리하는 판소리 무형문화재가 지정되었다. 제1호 남도판소리를 시작으로 남도판소리서편제[제6호], 남도창동편제[제9호], 판소리고법[제11호], 강산제심청가[제14호], 판소리동편제[제15호], 판소리춘향가[제16호] 등이 지정되었다. 지정 현황을 살펴보면 광주 지역의 대세는 여전히 서편제 소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한편, 서편제 이외의 판소리 유파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980년대부터 많은 명창이 광주 지역을 오가면서 여러 소리제의 교류가 형성되었고, 광주 지역에서 전승되는 판소리로 정착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방성춘·송순섭·전인삼 등이 동초제와 동편제를 광주 지역에 전승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의의와 평가]

광주 국악은 근현대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지속되어 왔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현대문명에 밀려 전통성 깊은 국악이 설 자리는 좁아지는 상황이다. 시대적·정치적·문화적 격변 속에서도 오늘날 광주가 국악의 산실이자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광주 국악을 지켜 온 국악인, 애호가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광주 국악의 지속을 위해 국악인들을 규합하고, 단체를 설립하고 또 후학을 양성하였다. 특히, 광주 국악계의 성과는 국악 전승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 피폐함 속에서도 광주국악원을 비롯해 다수의 사설 학원이 설립되었고, 1973년에는 시 최초로 시립국악원을 세워 관 주도의 국악 교육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은 국악 교육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까지 정규교육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무엇보다 광주 국악을 지속·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 광주 지역은 근현대 판소리사를 이끈 수많은 명창을 배출한 지역이며, 김창환협률사, 광주협률사, 광주성악연구회 등의 활동으로 광주·전라남도에 적을 두었던 명창들이 대도시 광주를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면서 전국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또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지역 출신 명창인 임방울을 내세워 광주 국악의 입지를 견고하게 하고 있다. 광주의 판소리는 박유전으로부터 전승된 서편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광주 판소리를 융성하게 한 김창환·김채만·정응민이 모두 서편제 명창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재는 많은 명창이 광주에 정착하여 동초제와 동편제 판소리를 뿌리내렸고, 이로 인해 다양한 판소리 유파를 보유한 광주는 판소리 전승의 대표 지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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