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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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敬命 |
영어공식명칭 | Go Kyeongmyeong |
이칭/별칭 | 이순(而順),제봉(霽峯),태헌(苔軒),태사(苔槎),충렬(忠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출생 시기/일시 | 1533년 - 고경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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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고경명 진사 입격|생원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552년 - 고경명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고경명 식년시 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58년 - 고경명 호조좌랑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59년 - 고경명 세자시강원 사서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고경명 사간원정언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고경명 사간원헌납, 지평, 홍문관부수찬, 홍문관수찬, 홍문관부교리 등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563년 - 고경명 울산군수로 좌천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고경명 서장관(書狀官)으로 명에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581년 - 고경명 영암군수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고경명 동래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고경명 통정대부 공조참의지제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592년 - 고경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592년 - 고경명 예조판서 추증 |
출생지 |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
묘소|단소 |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 |
사당|배향지 | 포충사(褒忠祠) -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775-1|947-4] |
성격 | 문관|의병장 |
성별 | 남 |
본관 | 장흥(長興) |
대표 관직 | 홍문관교리|영암군수|동래부사 |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홍문관교리, 영암군수, 동래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가계]
고경명(高敬命)[1533~1592]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고자검(高自儉), 할아버지는 형조좌랑(刑曹佐郎) 등을 지낸 고운(高雲), 아버지는 고맹영(高孟英)이고, 어머니는 서걸(徐傑)의 딸 남평서씨(南平徐氏)이다. 부인은 김백균(金百鈞)의 딸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자녀는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고준후(高遵厚), 고순후(高循厚), 고유후(高由厚), 고용후(高用厚) 등 6남과 박숙(朴橚)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활동 사항]
고경명은 1533년(중종 28) 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에서 태어났다. 고경명은 1552년(명종 7) 진사와 생원에 입격하였고, 그로부터 6년 뒤인 1558년(명종 13)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사간원, 홍문관(弘文館) 등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1563년(명종 16) 당시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에 대한 조정의 논의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렸다는 이유로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고경명은 새로운 부임지로 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그 뒤로는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접고 은거하였다.
그로부터 약 20여 년이 지난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靈巖郡守)에 발탁되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이후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와 같이 주로 외직 생활을 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이 일으킨 의병은 당시 호남 최대 규모의 의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고경명은 광주·순천·남원·옥과 일대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여러 의병장에게 격문을 띄워 상황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의병 세력을 규합하려 노력하였다. 본래는 북상을 목표로 6월에 은진까지 진격하였으나 왜군이 금산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남하하였다. 7월 10일에 금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고,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패장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끝까지 대항하다 결국 아들 고인후,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학문과 저술]
『제봉집(霽峰集)』은 1617년(광해군 9) 고경명의 아들인 고용후(高用厚)가 남원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편집하여 간행한 고경명의 시문집이다. 본집·속집·유집 등 전체 7권 6책의 목판본으로, 이항복(李恒福)의 서문과 유근(柳根)의 발문이 있다. 고경명이 쓴 각종 작품과 임진왜란 당시의 격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유서석록(遊瑞石錄)」은 고경명이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되어 고향에 은거할 때 지은 무등산 기행기이다. 1574년(선조 7)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무등산을 유람하고 그 소회를 적은 것으로, 모두 한문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문집인 『제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고경명은 거의 20년에 가까운 은거 기간 동안 무등산을 비롯한 광주 지역 일대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며, 이를 계기로 무등산 누정문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하다.
[묘소]
고경명의 묘소는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 430-2번지에 있다. 묘소 앞에 세워진 고경명의 신도비[장성고경명신도비(長城高敬命神道碑)]는 2008년 9월 19일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고경명은 1592년(선조 25)에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1771년(영조 47)에 부조지전(不祧之典)[사당에 신주를 영구히 모시게 하는 특전]을 명받았다.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는 1601년(선조 34) 고경명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으로, 1603년(선조 36)에 ‘포충(褒忠)’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후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유팽로, 안영 등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릴 당시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헐리지 않은 사당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폐사를 면치 못하였지만 1978년 호국선열유적지 정화사업으로 크게 정비되었다. 1974년 5월 22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