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434 |
---|---|
한자 | 石戰 |
이칭/별칭 | 편전(便戰),석전놀이,돌팔매놀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놀이/놀이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정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마을 주민들이 편을 갈라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를 겨루던 민속놀이.
[개설]
석전(石戰)은 개천이나 넓은 가로(街路) 등의 지형을 경계 삼아 수백 보 거리를 두고 일대의 주민들이 편을 갈라 돌을 던져 누가 먼저 쫓겨 달아나는지에 따라 승부를 가리는 놀이이다. 편전(便戰), 석전놀이, 돌팔매놀이라고도 한다. 석전은 주로 정월 대보름 무렵에 행하여졌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단오나 추석에도 벌어졌던 민속놀이이다.
[연원]
옛날 사람들이 동물을 사냥할 때 추적하는 능력이 약하여 도구를 사용하여 이를 대신하였던 돌팔매질이 발전하여 석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수서 동이전(隋書東夷傳)』에 "고구려에서는 해마나 정월 초순이면 패수(浿水)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왕이 가마[腰輿]를 타고 의장(儀仗)을 세우고 이 놀이를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은 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 들어가 신하들을 양편으로 갈라서 서로 물을 끼얹고 돌을 던지면서 고함쳐 쫓기를 두세 번 하고서야 그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석전은 중기에 이르도록 행하여 온 단오 행사로, 『태종실록(太宗實錄)』을 보면 "태종 원년(1403년) 5월 국속(國俗)에 5월 5일에 넓은 길에 크게 모여서 돌을 던져 서로 싸워 승부를 겨루는 풍습이 있는데 이를 석전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석전은 금지된 놀이이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권44 「세가(世家)」에는 공민왕(恭愍王) 23년(1374년)에 격구(擊毬)와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하였고, 『성종실록(成宗實錄)』 권30 성종 4년(1473년) 5월 6일에 보면 성종 때도 역시 석전놀이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는 곧 석전이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하여져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제재 속에 석전놀이가 중지된 곳도 있고 그 규모가 축소된 곳도 있었으며, 해방 이후 점차 사라졌다.
[놀이 방법]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는 1960년대 초반까지 매년 8월 추석 무렵 석전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끼리 하지 않고 이웃 마을인 나주시 마을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대하는 마을과 특별히 나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심하게 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이 싸움을 시작하였다가 점차 청·장년들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이때쯤이면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면 동네 청년들의 적개심이 절정에 달하여 서로 쫓고 쫓기는 접전이 이루어지다가 결국에는 몽둥이를 들고 육박전까지 벌이게 되었다. 심한 경우에는 쫓기는 사람들의 마을까지 쳐들어가서 싸우기도 하였다. 쫓겨간 마을에서는 다시 사람을 불러 모아 불시에 공격을 해오기도 하였지만, 칠석동이 세가 크고 사람이 많아서 지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 마을에서 공격을 해오면 며칠이고 계속되지만 다시 공격을 해오지 않으면 돌싸움은 끝이 났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석전은 우리 민족의 용맹스러운 기상을 엿볼 수 있는 민족놀이이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권18 명종 10년(1555년) 5월 27일에 왜변(倭變)이 일어났는데, 임금이 왜구를 진압할 방책을 의논하던 중 석전꾼[石戰軍]으로 김해(金海) 사람 100명을 뽑아 보낸 것처럼 안동(安東) 사람들을 뽑아 방어하게 하자는 대책이 나왔다. 이처럼 전쟁 등 유사시에는 석전꾼들이 활약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석전놀이를 통해 우환을 떨치고, 한해의 안녕과 풍년, 무병을 기원하였다.
[현황]
석전은 민속놀이이면서 왜구를 진압할 방책이 될 만큼 성행하였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돌팔매싸움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있어 나라에서 금지하기도 하였다.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서도 1960년대 초까지 행해졌지만 현재는 행해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