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35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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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音樂 |
영어공식명칭 | Music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유하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예전부터 현대까지 행해지는 모든 장르의 음악.
[개설]
광주광역시는 예향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호남은 판소리의 발생지이고 예로부터 넓은 평야가 있는 지역으로서 농경문화 속의 민속악, 민요의 발달도 상당하다. 광주가 1896년 전남도청 소재지로 결정되고 근대 도시로 급성장하게 되면서 문화 활동도 집중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궁내부 협률사의 해체로 하향한 국악인들과 호남에 넓게 퍼져 있던 국악인들이 모여 국악 교육 기관이 설립되면서 더욱 전문적인 국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편, 20세기 초반부터 기독교를 통하여 유입된 서양 음악은 전통 음악보다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여기에 근대화와 함께 스며든 대중음악까지 더하여져 현재 광주광역시에서 행해지는 국악과 서양 음악, 대중음악의 활동은 균형을 이루면서 전개되고 있다
[광주 국악]
1906년 궁내부 협률사가 해체되자 많은 명인들과 명창들의 낙향이 이루어져 전라남도 광주의 국악계는 오히려 풍성해졌다. 대표적인 명창으로는 김창환[광주], 김채만[광주], 정응민[보성] 등이 있다. 낙향한 명창들은 광주에 김창환협률사와 광주협률사를 조직하여 서편제 판소리 전승에 도움을 주었는데, 협률사의 명인·명창들이 광주의 국악 교육기관인 광주권번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광주권번에서는 학예부를 설치하여 가·무·악을 교육하였는데, 박동실, 정광수 등이 활동하면서 장옥순, 장월중선, 김소희, 안채봉, 박송희, 한애순, 박화선, 정미옥 등의 명창을 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광주의 국악계는 피폐해졌다. 하지만 국악인들과 애호가들의 노력으로 1962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전라남도지회 창립되고, 1974년 광주시민회관 내 광주시립국악원이 창설되면서 공연 활동과 함께 광주의 국악 교육 기관의 역할도 맡았다. 광주시립국악원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광주의 풍류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도 명창들이 광주에 사설 국악학원을 설립하여 국악 전승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70년대에는 보성소리 정음민의 제자들인 정권진,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이 큰 상을 받고, 제5호 판소리 보유자로 인정을 받으면서 활발한 공연을 전개하였다.
1981년에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가 신설되고, 1990년에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과 광주시립창극단이 창단되었다. 이외에도 국악 인구의 팽창과 함께 사설 공연 단체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졌다. 전통 음악을 고수하는 전통음악 연주단체와 퓨전 음악을 추구하는 단체, 관현악과 소리의 만남, 창작 국악곡을 연주하는 단체들이 생성되어 각종 축제와 행사에 큰 활약을 하면서 풍류가 있는 고장의 관객 수요에 국악을 전공한 전문인들이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공급함으로써 광주의 국악 문화를 풍성하게 하였다.
구비 전승의 민요로는 「용전들노래」, 「서창들노래」, 「물품는 소리」, 「모치는 소리」, 「모판 밟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메는 소리」, 「콩밭메기 노래」 , 「길쌈노래」 , 「베틀노래」 등의 노동요가 있고, 「상여소리」, 「달구질소리」, 「볼매당 소리」 등의 의식요가 전승되고 있다. 무가로는 「성주풀이」, 「손님풀이」, 「오구풀이」, 「제석풀이」 등이 내려오고 있다. 판소리는 서편제를 주로 전승하고 있는데, 시에서는 「남도창동편제」, 「남도판소리」, 「판소리춘향가(동초제)」, 판소리고법을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광주를 대표하는 명창으로는 김창환, 공대일, 박동실, 박옥심, 박정자, 임방울, 정광수, 천대응, 한승호, 한애순 등이 있다. 유희요로는 「강강술래」, 「고싸움놀이 노래」, 「진도아리랑」, 「둥당애타령」, 「산아지타령」, 「창부타령」, 「각설이타령」, 「흥글타령」, 「식구타령」, 「중타령」, 「장모타령」, 「방귀타령」 등이 내려오고 있다.
민속음악인 농악으로는 영산강 상류와 황룡강, 극락강을 낀 넓은 평야에 있는 광산의 농악이 전승되고 있다. 광산의 농악은 마을굿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전문 음악인들의 판굿과 함께 연행되고 있다. 광산의 농악은 문굿, 당산굿, 철용굿, 샘굿, 들당산굿, 마당밟이, 날당산굿, 판굿 등의 굿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광주 서양음악]
광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것은 1904년 선교사 벨[배유지]과 의사 오웬 두 가정이 선교를 목적으로 이사 온 것과 함께한다. 1905년 말에 교인이 250명에 달하자 광주교회를 지어 찬송가를 부르면서 예배를 드렸는데, 음악의 발전은 공연장의 설립을 가져왔다. 1900년대 지어진 양명사, 1912년에 지어진 오웬기념각, 1925년 황금동의 광주좌, 1937년의 광주극장이 개관되면서 연극, 영화, 음악 공연이 이루어졌다. 해삼위락단[블라디보스토크 교포음악단]의 공연, 숭일학교 학생들의 희극과 가극 「초로인생」,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열세 집」 등의 공연이 가능하였던 것은 공연장의 존재 덕분이었다. 광주 최초의 서양음악회는 오웬기념각에서 열린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김필례의 독창회였다.
광주의 최초 음악 교사는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유화례(Florence Eliabeth Root)[1893~1995]이다. 유화례의 제자 오경심은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무사시노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대 음악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취주악대, 찬양대, 중창 등의 활동이 있었다. 서양 악기도 피아노, 오르간, 금관악기 등이 교회를 통해서 소개되고 연주되었다.
1950년에 조선대학교 초급대학부에 예술학과가 신설되어 음악인을 양성하고, 1955년 광주사범학교가 신설되어 음악 교사를 배출하였다. 1950년대 이후 음악 연주 단체들이 생성되었는데, 1962년 광주 뉴스트링 오케스트라가 창단되었고, 1966년에는 광주관현악단이 창단되었다. 1964년에는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중앙여자고등학교에서 현악합주단이 창단되고, 1961년 새로나소년합창단, 1963년에 카네이션합창단, 1965년 오라토리오합창단이 창단되면서 서서히 서양 음악의 대중화가 일어났다. 또 한편으로는 전문 음악인들의 공연이 있었다. 1959년 신언태와 김천애가 각각 독창회를 열었고, 1961년 김정규의 피아노 독주회 이래로 크고 작은 전문 음악회가 이어졌다. 1952년 『전남일보』 주최로 열린 호남예술제는 현재까지도 광주 지역의 가장 중요한 음악인의 등용문이 되고 있으며, 1968년에는 광주 지역에 남도문화제가 열려 지역 문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1974년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1981년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1981년 광주교육대학교 음악교육과 4년제 개설, 1982년 광주예술고등학교, 1988년에 호남신학대학교 교회음악과, 1990년 광신대학교 교회음악과, 1994년 광주대학교 음악학과, 2003년 남부대학교 음악학과의 설립으로 광주의 음악계는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음악 인구가 늘어나고 대학원 진학과 유학 등을 통해서 전문 음악인들이 양산되었다. 아마추어 음악과 전문 음악으로 나누어지면서 대중화와 전문화가 더욱 뚜렷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공연이 전문 공연장을 통하여 관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1986년 11월 광주직할시와 전라남도가 분리되면서 1987년 한국음악협회 광주광역시지회[광주음협]가 탄생하였다. 한국음악협회 광주광역시지회는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 광주음악제, 국제 교류사업과 공연, 타 지역 교류사업과 공연, 신인음악회, 광주광역시 지원사업 참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광주광역시연합회 아트페스티벌 참여, 광주음악상 시상, 광주문화재단과 공동주관사업, 비영리 단체 공익사업 등을 통해서 광주광역시의 중요한 음악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립 단체로는 광주시립교향악단, 광주시립합창단, 광주시립어린이합창단, 광주시립오페라단이 창설되었다. 이외에도 오페라단, 오케스트라, 합창단, 중창단, 앙상블 등 전문 음악인들에 의해 창단된 공연단과 아마추어 공연단의 활동도 활발하다.
[광주 대중음악과 민중음악]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산업이 서울특별시 중심으로 발달한 탓에 광주광역시의 대중음악은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다. 하지만 광주의 대중음악과 민중음악의 침투력은 오히려 시민 밀착형으로 활발하게 움직일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향유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다. 광주의 대중음악은 DJ 문화와 통기타 문화가 정착한 1970년대 초부터이다. 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를 통해서 소개된 이장순과 국소남, 뒤를 잇는 후배들의 활동, 1970년대 후반에 전국을 휩쓸었던 각종 대학가요제를 통하여 입상한 가수들의 활동, 개별적인 노래동아리의 활동들이 대중음악을 이끌었다.
지금은 2000년대에 신설되기 시작한 각 대학의 실용음악과를 통하여 양산되는 가수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제1회 엠비씨대학가요제 출신 박문옥, 박태홍, 최준호[소리모아]는 노래 공연과 함께 활발한 창작 활동, 녹음실 운영, 후배 양성까지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더 나아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후속 운동인 5월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필요하였던 민중가요[「직녀에게」, 「전진하는 오월」, 「목련이 진들」 등]를 만들어 문화 운동을 풍성하게 지원하였다. 녹음실의 운영은 광주에서 양질의 민중가요 음반 제작을 가능하게 하였다. 제3회 엠비씨대학가요제 출신인 김종률은 「노래굿 넋풀이」에 속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창작하여 대한민국 민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었다. 「바윗돌」의 정오차, 「빙빙빙」의 하성관, 「모모」의 김만준 등도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들이다.
1984년 광주의 젊은 음악인들은 음반 『예향의 젊은 선율』을 기획하여 발매하였다. 「바위섬」[배창희 작곡]이 전국 순위를 차지하면서 김원중을 전국에 알렸으며, 후속 작업으로 만든 김원중의 「직녀에게」[문병란 시, 박문옥 작곡]도 한동안 금지곡이었으나 명곡으로 남았다.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은 광주에 독특한 문화를 자리 잡게 하였다. 박문옥 이외에도 1980년대 학생운동을 전개하면서 갑작스럽게 민중가요 싱어송라이터가 된 박종화[「바쳐야 한다」, 「파랑새」, 「투쟁의 한길」로 작곡가]와 정세현[범능, 「광주출정가」, 「혁명 광주」의 작곡가], 「동지」의 작곡가 박철환, 「죽창가」를 작곡한 화가 김경주, 「일어서는 사람들」의 대본 작가 김정희와 같은 사람들이 독특한 경력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광주의 거리에서는 민중가요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5.18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이 성취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재도 5월이면 기념식과 추모 행사를 통하여 민중가요가 울려 퍼진다. 민중가요의 새로운 창작이 주춤한 지금도 광주에서는 전국 단위의 오월창작가요제를 통하여 사회의 모든 현장을 노래로 재현하는 것을 격려하고 있다.
[현황]
문화산업이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실정을 고려할 때, 광주광역시의 지역적 한계는 어쩔 수 없이 광주 음악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악은 독특한 민요와 민속악, 판소리로 광주 지역의 특성을 보듬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서양 음악에 뛰어난 음악인들은 서울로 향한다. 대중음악도 산업의 중심이 서울이라는 환경 때문에 광주 지역의 어려움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풍류를 즐기는 시민들의 대중음악 향유는 각별하여 가수들은 각처에서 라이브 카페를 열거나 다양한 공연을 통하여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