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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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用厚 |
영어공식명칭 | Go Yonghoo |
이칭/별칭 | 선행(善行),청사(晴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예조좌랑,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고용후(高用厚)[1577~1648]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형조좌랑 등을 지낸 고운(高雲), 할아버지는 고자검(高自儉)이며,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고,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고용후의 첫 번째 부인은 이인기(李麟奇)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기홍헌(奇弘獻)의 딸이다.
[활동 사항]
고용후는 1577년(선조 10)에 광주 지역 압보촌에서 태어났으며, 1605년(선조 38)에 진사와 생원[장원]에 입격하였고, 이듬해인 1606년(선조 39) 증광시(增廣試)에서 을과(乙科) 3위[전체 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용후는 1607년(선조 40)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61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1614년 병조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으며 1616년 남원부사(南原府使), 1624년 고성군수(固城郡守) 등 외직 경험은 물론 여러 차례 중국에 사절로 파견되었다. 선조가 죽은 뒤에는 『선조실록』 편찬에 기주관(記注官)으로 참여하였다. 고용후는 1648년(인조 8)에 사망하였는데,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김자점(金自點)의 미움을 사 여러 해를 금옥(禁獄)에서 막혀 있다가 판결사로서 마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문과 저술]
『정기록(正氣錄)』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과 장남 고종후, 차남 고인후의 행적과 충절을 기록한 실기이다. 고경명의 5남 고유후(高由厚)가 1599년(선조 32)에 처음 편찬하였고, 고유후의 동생 고용후가 1608년(선조 41)에 증보하여 펴냈다. 전체 1책의 목판본으로, 윤근수(尹根壽)·이정구(李廷龜)·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유근(柳根) 등의 서문과 증보 간행한 고용후를 비롯하여 김수항(金壽恒)·신익성(申翊聖)·임성헌(林聖憲)·조명교(曺命敎)·박광일(朴光一)·조현명(趙顯命) 등의 발문이 실려 있으며, 고경명 부자가 보낸 각종 격서, 통문, 별지, 편지와 묘갈명, 연보 등이 있다.
『청사집(晴沙集)』은 고용후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1680년(숙종 6)에 간행되었으며, 전체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서광계(徐光啓)와 김수항(金壽恒)의 서문이 확인되며, 주로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의병들을 애도하는 추도문, 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