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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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憲兵隊本部- |
이칭/별칭 | 광주 헌병분견대 주둔지 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1가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재훈 |
건립 시기/일시 | 1917년 8월 - 광주헌병대본부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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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945년 9월 - 광주헌병대본부 철수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7년 7월 - 전라남도 광주 주둔 일본군 철수 시작 |
소재지 | 광주헌병대본부 터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1가 |
성격 | 옛터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하였던 병영 옛터.
[개설]
1910년 조선총독부의 헌병 경찰(憲兵警察)을 주축으로 한 무단통치에 의해 일본군 헌병대가 전라남도 경무부와 함께 전라남도 광주군 성내면 남내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1가 일대]의 옛 전라남도 관찰부(觀察府) 광주 관아(官衙) 안에 광주헌병대본부를 설치하였다. 총부지 847평[약 2800㎡], 건평 218평[약 720㎡]에 16개 동이 있었는데 광주헌병대본부는 광주 관아의 부속 건물을 사용하였다.
당시 전라도와 제주도에는 나주, 목포, 완도, 해남, 고창, 군산, 김제, 전주, 진안, 제주 등 10개소에 경찰서가 설치되었다. 장성, 영산포, 장흥, 순천, 화순 등에는 헌병분대가 설치되었다. 기타 분견소(分遣所) 6개소, 분견대(分遣隊)의 관할 파견소와 출장소가 각각 25개소였다.
광주헌병대본부가 있던 자리는 1914년 4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동광산정에서 1930년 4월 전라남도 광주군 본정1정목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2005년 11월 광주헌병대본부 터에 '민주의 종각'이 준공되었다가 헐리고,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 있다. 민주의 종각은 2013년 11월 복원되었다.
[변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전라남도에서는 일제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에 따라 일본은 1906년 6월 거류민 보호와 의병 진압의 명목으로 1개 중대 규모의 군대를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치안 보조의 역할을 하는 일본군 헌병대도 의병부대 진압에 동원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대의 활동은 1909년부터 활발하게 나타나는데, 광주군 마지면과 삼각산 등지에서 의병부대를 공격한 기록이 확인된다. 당시 일본은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의 헌병부대를 유지하지 못하여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현지에서 뽑아 활용하였다. 일본군 헌병대는 일본군 광주수비대 및 경찰 병력과 함께 의병부대의 진압에 나섰으며, 수많은 의병들이 이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사살당하였다.
1917년부터 지금의 금남로1가 일대에 주둔하던 일본군 광주수비대가 철수하기 시작하는데, 남겨진 병영과 시설에 일본군 헌병대가 주둔하며 헌병 경찰로 전라남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은 광주에 파견된 헌병분견대였기 때문에 당시의 주둔지는 헌병분견소라 불렸다.
[위치]
광주에 파견된 일본군 헌병분견대가 주둔하였던 장소는 지금의 금남로1가 일대이며, 본래는 대형의 단일 필지였지만 이후 여러 필지로 분할되었다. 광주헌병대본부는 지금의 '민주의 종각' 일대에 있었며, 파견 헌병대장이 전라남도 경무부장을 겸직하였기 때문에 전라남도 경무부를 겸하는 시설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군 헌병대는 경찰과 함께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민간인 경찰보다 훨씬 가혹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가혹한 헌병 경찰 제도는 1919년 3.1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3.1운동 발발 당시에는 총검과 기마를 이용한 가혹한 탄압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