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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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2002-準決勝決定戰 |
영어공식명칭 | 2002 World Cup Quarter -Finals |
분야 | 문화·교육/체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병필 |
[정의]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2002한일월드컵 8강전 경기.
[개설]
2002월드컵 준결승 결정전은 2002한일월드컵에서 한국과 스페인의 8강전 경기로 한국이 스페인을 맞아 0대 0으로 득점 없이 비겼지만, 승부차기 끝에 5대 3으로 승리하였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를 창조하였다.
[광주! 월드컵 개최 도시로 8강전을 배정받다]
1996년 5월 31일은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다고 공표한 날이다. 단독 개최가 아닌 공동 개최로 대회가 결정되면서 한국의 개최 도시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95년에 16곳의 월드컵 후보 도시로 선정된 광주 또한 타 시·도와의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당연하며, 대회 인프라가 부족한 광주로서는 대회 유치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에 광주광역시는 광주 개최를 위한 범시민 참여 활동을 추진하였다. 1996년 7월 범시민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민·관이 함께 광주 개최를 홍보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광주광역시는 광주·전남 향우회 및 중앙 관직이나 재계에 있는 지역 출신 인사들을 통해 교섭 활동을 벌이고, 광주에서의 축구 열기 확산을 위해 지역 은행과 함께 축구 발전 공익신탁예금상품을 개발하고, 월드컵 관람통장을 개설하는 등 광주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광주에서의 월드컵 개최는 경제적으로 소외된 서남권 지역의 발전과 민주 성지로서의 광주의 이미지와 높은 시민의식 그리고 예향의 향취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총력을 기울인 개최 노력으로 1997년 12월 29일 월드컵 개최 도시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2000년 5월 24일에 월드컵축구 대회조직위원회에서 본선 32경기의 개최 도시를 확정해 발표하였다. 월드컵 준결승 결정전인 8강전은 4경기 중 2경기가 한국에서 치러지는데, 영·호남의 균형적 배분 등 지역적 요소를 고려해 광주와 울산에 배정되었다. 당시에는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8강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8강전은 지역 배분이라는 명분으로 막을 내렸다.
[광주로 가는 길은 오직 조별리그 1위와 16강 승리뿐]
8강전이 광주에서 개최되는 것은 확정되었지만, 한국 축구가 광주로 가는 길은 한 가지 경우의 수 말고는 없었다. 먼저 조 1위로 조별 리그를 통과하고, 16강전을 이기는 것이다. 한국 축구는 2002한일월드컵 전까지 총 5회에 걸쳐 월드컵에 진출하였지만, 조별 리그를 통과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광주에서 치러질 한국 축구의 8강전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2002한일월드컵 목표는 개최국의 이점을 십분 발휘해 첫 승을 넘어 16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한국 축구는 16강 진출을 위해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을 선임하였다. 히딩크 감독은 강한 체력 훈련과 장기 합숙 훈련을 통해 팀의 조직력을 끌어올렸다. 국민들도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하지만 여론조사기관 AC닐센에 따르면, 어려운 대회임을 알기에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거라고 믿는 국민은 34% 정도였다.
드디어 2002한일월드컵이 개막하고 6월 4일 부산에서 조별 리그 1차전이 열렸다. 첫 상대는 폴란드였다. 한국은 경기 내내 주도권을 가져와 2대 0으로 승리하였다. 이는 한국 축구의 월드컵 역사상 본선에서 일궈낸 첫 승리였다. 조별 리그 두 번째 경기인 미국과의 경기는 6월 10일 대구에서 열렸다. 한국이 속한 D조 중 미국이 가장 만만한 상대라고 생각하였지만, 1대 1무승부로 종료되었다. 16강 진출을 위한 마지막 경기인 조별 리그 3차전은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4위의 강호이며, 이번 대회 우승 후보 중 하나인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한국은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에 따라 비겨도 떨어질 수 있었다. 결국 전반과 후반에 각각 1명씩 퇴장당한 포르투갈의 수비 공간을 파고들어 한국이 1대 0으로 승리하였다. 이 결과 한국은 D조 1위로 조별 리그를 통과하고 이번 월드컵 목표인 16강 진출을 달성하였다. 따라서 광주에서의 8강전도 1경기만 더 이기면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16강전은 전통의 강호 이탈리아였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였지만, 의외로 졸전을 거듭하며 조별 리그 2위로 올라왔다. 6월 18일 대전에서 펼쳐진 16강 경기는 이탈리아의 선제골로 한국의 패색이 짙었지만, 경기 종료 3분 전 기적과도 같이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에 골든골을 넣으면서 2대 1로 승리하였다. 이로써 광주에서 한국 축구의 8강전이 열리게 되었다.
[8강전 상대는 스페인 IN 광주]
2002한일월드컵 8강전 상대는 스페인으로 정해졌다. 대진표상 한국보다 16강 일정이 빨라 6월 16일 수원에서 아일랜드를 물리치고 올라왔다. 스페인은 FIFA 랭킹 7위에 올라있는 축구 강국으로 무적함대라고도 불린다. 선수들이 모두 유럽 소속 리그에서 뛰고 있으며, 개인기가 좋고 훌륭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 중 한 팀이다. 하지만 스페인은 그동안 역대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950브라질월드컵에서 준결승에 올랐지만, 지금과 같은 조별 리그나 토너먼트 제도가 아니었다. 직전 대회인 1998프랑스월드컵에서도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였다. 1994미국월드컵에서는 한국과 붙어 2대 2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번 8강전은 스페인 입장에서 여러 변수가 존재하였다. 개최국을 상대로 경기하는 것은 불리한 측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낯선 경기장과 홈 관중의 일방적 응원이 그런 변수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에게 이번 8강전의 변수 중 제거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광주였다. 이미 스페인은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룬 경험이 있고, 광주는 스페인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6월 2일 조별 예선 1차전이었던 스페인과 슬로베니아전은 광주월드컵경기장의 개막식이기도 하였다. 광주 시민 모두가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한 덕분인지 스페인은 52년 만에 월드컵에서 첫 경기를 승리하는 역사를 세웠다. 스페인은 첫 경기 부진 징크스를 털어내자 조별리그를 전승으로 마쳤고, 조 1위로 통과하였다. 16강까지 4게임에서 5실점을 해 매 경기 골을 허용할 만큼 수비진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공격에서는 조별 리그 매 경기 3골을 득점하는 등 우승 후보라 불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런 스페인을 광주에서 다시 만났다.
[월드컵 8강전 응원 열기 속 광주]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월드컵 8강전이 성사되자 광주는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광주월드컵경기장 주변은 장사진을 이루었는데, 경기 시작 3시간 전부터 전국 각지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몰려 온 붉은악마들과 축구팬들로 온통 붉은 물결이었다. 오전부터 옛 전라남도도청 앞에서 금남로 광주은행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500m 일대는 광주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인 20만 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광주광역시교육청에서는 나라 사랑과 공동체 의식을 체험하자는 뜻에서 일선 학교 250곳에 임시 휴교를 권장하는 공문을 보냈고, 광주 시내 초·중·고등학교가 임시 휴교하였다. 그래서 가족 단위의 응원객이나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 응원객들이 오전부터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도청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옛 전남도청 광장뿐 아니라 상무시민공원, 남구청, 일곡공원, 쌍암공원, 북구청소년수련관, 전남대학교 후문 등에서 대형 LED전광판을 세워 거리 응원을 위해 모인 시민과 함께하였다. 광주향교 대성전에서는 오전 10시에 지역 유림 200여 명이 모여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의 4강 진출을 염원하는 문묘고유제를 지냈다. 광주의 대표적 법인 기업인 광주신세계백화점도 광주로 몰릴 외지 응원단과 교통 편의를 위해 임시 휴업하였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인파가 한꺼번에 몰릴 때 일어날 불상사에 대비해 10군데 이상의 응원 장소에 대형 전광판 설치를 지원하였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사고가 날 수 있기에 경찰 병력 50개 중대를 배치하고 크고 작은 불상사에 대비하였다. 또한 월드컵 기간 동안 진행되는 차량 2부제 자율시행에서 한 걸음 나아가 경기 당일 자가용 안 타기 운동을 펼쳤다. 붉은악마 티셔츠 1만 벌을 구입해 월드컵경기장 관람객에게 무료로 나눠주고, 근무 중에도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일하는 붉은색 상의 입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뿐 아니라 월드컵 열기가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타올랐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월드컵 개막 전과는 달리 우리 국민 90%는 한국 축구가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였다. 최종 예상 성적으로도 90% 이상이 4강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였다.
[광주에서의 8강전, 마지막 승부차기의 환호]
2002한일월드컵 8강전은 이집트의 알간도르 가말(Elaghandour Gamal) 주심의 호루라기에 의해 시작되었다. 초반부터 스페인이 강하게 나왔다. 전반 5분, 김태영 선수가 백태클에 걸려 넘어졌고, 전반 12분에는 김남일 선수가 발목을 밟혀 결국 32분에 교체되어 나갔다. 이런 한국 선수들에 대한 거친 공세에도 한국의 수비수들은 협력과 강한 압박으로 잘 대응하였다. 공격력이 강한 스페인답게 많은 슈팅을 기록하며 한국측 골문을 노렸다. 스페인의 스타 선수인 라울(Raul) 선수의 부상으로 대신 출전한 호아킨(Joaquin) 선수는 여러 번 수비수를 뚫고 공격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번번이 골로 연결시키지는 못하였다. 스페인 선수들의 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넘어가거나, 한 끗 차이로 헛발질을 하거나, 골대 옆 그물을 때리는 등 골로 연결되지 않았다. 스페인의 슛이 한국의 골망을 흔든 상황도 2번이나 나왔다. 한 번은 후반 3분 김태영 선수가 상대 공격수와의 경합 중에 목이 눌리는 것을 주심이 보고 반칙으로 선언하였고, 다른 한 번은 연장 1분, 골이 들어가지 전 크로스에 부심의 깃발이 들렸다는 점에서 주심이 크로스 전 라인 아웃으로 선언하였다. 경기 전체 슈팅수는 압도적으로 스페인이 앞섰다. 8대 17[문전슈팅 3대 7]이었다. 하지만 볼 점유율은 52대 48로 한국이 앞섰다. 우승 후보로 평가받는 스페인과 대등한 경기를 한 것이다. 스페인의 압도적인 공격력에 뚫리지 않고 버텨낸 한국 수비는 오프사이드를 5개나 만들어 내었다. 결국 연장까지 갔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고, 결국 승부차기로 들어섰다.
한국은 앞 선 경기인 미국전과 이탈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얻어냈지만 모두 실패했었다. 승부차기의 순서는 한국의 선축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키커는 황선홍 선수였다. 황선홍 선수가 찬 볼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걸 스페인 골기퍼 카시야스(Casillas)가 방향을 읽고 막았지만, 옆구리를 스치면서 골대로 들어갔다. 훗날에 황선홍 선수는 "첫 번째 키커여서 많이 떨렸어요. 하지만 골이 성공되었을 때 운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반드시 이길 거라는 느낌이 직감적으로 다가왔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이렇게 황선홍 선수의 골에서 시작된 4강 신화는 박지성 선수, 설기현 선수의 득점을 거쳐 네 번째 키커인 안정환 선수 차례까지 왔다. 미국전 페널티킥 실수를 마음에 담고 있었겠지만, 과감하게 한 가운데로 차 넣어 성공시켰다. 스페인도 키커 이에로(HIerro), 바라하(Baraja), 하비(Xabi) 선수가 연달아 성공시켰다.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호아킨 선수가 네 번째 키커로 나왔다. 호아킨 선수는 볼을 가볍게 오른쪽으로 찼고, 볼의 방향을 읽은 이운재 골기퍼가 이를 막아냈다. 이렇게 4강에 한 걸음 다가갔다. 이어서 주장 완장을 찬 다섯 번째 키커인 홍명보 선수가 찬 볼이 가볍게 골대 상단 구석에 들어가면서 4강 진출을 확정하였다. 영국의 『로이터통신』의 "한국이 월드컵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보도처럼 광주에서 한국 축구는 4강에 진출하는 신화를 만들었다.
[월드컵 4강 신화, 그 투지를 광주에 새기다]
광주에서 보여준 한국 축구의 정신력과 투지는 그대로 4강 신화가 되었다. 또한 월드컵 4강 응원전을 통해 광주 시민은 단합과 높은 공동체 의식을 보여주었으며, 민주 성지 광주의 이미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월드컵 4강 신화는 한국 축구뿐 아니라 광주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월드컵 후 광주에서는 4강 신화를 기념하려는 행사들을 진행하였다. 2002년 6월 30일 광주월드컵경기장 지하 1층에 월드컵 4강 신화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관을 3억 6000만 원을 들여 조성하였다. 기념관에는 월드컵 경기구, 기념구, 공식 보고서, 화보집 등 15종의 기념물이 전시되었다. 2002년 10월 25일에는 제37회 시민의 날을 맞아 월드컵경기장으로 연결되는 2,950m 구간의 도로를 '월드컵 4강로'로 이름을 바꿨다. 염주체육관으로 이어져 있어 '염주로'로 불렸던 이 도로는 도로 주변 주민 885명을 대상으로 개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81%의 찬성을 받아냈다. 이 도로의 기점과 종점과 중간지점 3곳에 히딩크 기념표지석을 세웠는데, 표지석은 폭 1m, 높이 1.5m이며, 표지석에는 "저는 한국팀 감독으로 2002 월드컵 4강 승리의 역사를 광주에서 이룩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라는 히딩크 감독의 메시지 및 국가대표선수들의 친필 사인이 새겨져 있다. 2003년 11월에는 사업비 3억 원을 들여 월드컵경기장 앞 무궁화동산에 4강 신화를 창조한 기념조형물이 건립되었다. 조형물은 환희의 불꽃이라는 주제로 삼각뿔 모양이며, 높이는 월드컵 개최 연도를 의미하는 2002㎝이다. 2006년 6월 8일에는 광주 히딩크관광호텔[현 벤틀리호텔] 앞에서 2006독일월드컵을 앞두고 월드컵 4강 기념비를 세웠다. 월드컵 4강 신화의 투지로 한국 축구국가대표팀이 선전하길 기대하며, 4강 신화를 의미하는 4m 높이로 제작되었다. 히딩크관광호텔은 스페인과의 8강전 당시 히딩크 감독 및 한국 축구국가대표 선수들이 투숙한 호텔이었다. 월드컵 이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호텔 명칭을 히딩크로 바꾸고 히딩크 감독 및 국가대표선수들의 사인볼, 사진, 축구화, 유니폼 등과 관련된 200여 점을 전시해 놓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