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39
한자 楊林洞-宣敎師
영어공식명칭 The American Missionaries in Gwangju during the late 19th Century and the early 20th Centur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신재식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광주선교부를 세우고 선교 활동을 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이야기.

[개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904년(고종 41)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광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설립하였다. 이후 양림동은 광주 지역에서 개신교와 서구 근대 문화가 확산되는 발생지가 되었다. 양림동에 뿌리를 둔 광주 개신교와 개신교인들은 근대 시민사회 형성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1970년대에서 199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5.18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대적 배경]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호남신학대학교 구내 언덕에는 선교사 묘역이 있다. 이국적 느낌을 주는 다양한 형태의 묘비와 각진 봉분들이 자리 잡고 있는 묘역에는 광주와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다 1909년부터 1967년 사이에 사망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가족들이 묻혀 있다. 이들은 왜, 어떻게 양림동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양림동은 광주 지역에서 근대 문화가 처음 소개되어 자리 잡고 확산된 중심지로 '역사문화마을'로 알려져 있다. 양림동이 광주에서 근대 역사·문화의 중심지가 된 것은 이곳에 자리 잡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로 인해서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양림동에 광주선교부를 세우고 교회와 학교, 병원를 통해 개신교 복음과 서구 근대 문화를 광주 지역에 소개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의 활동과 자취는 양림동을 중심으로 광주 곳곳에 남아 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양림동까지 오게 된 것은 개신교의 한국 선교 흐름 속에 있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는 1884년에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원두우]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아편설라] 등이 한국에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1890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해 미국 전역에서 선교 활동을 보고하였다. 언더우드는 1891년 10월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선교사 동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서 당시 밴더빌트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윤치호와 함께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강연하였다. 이를 계기로 1892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가 7명의 선발대를 파송한 이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에 온 미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1893년 '장로회 선교부 공의회'를 조직했다. 이 기구에서 선교 지역을 분할하였는데, 전라도 지역을 미국 남장로교가 담당하게 되었다. 1893년 전주 지역에서 전라도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1896년 전주와 군산에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1896년 전국 행정조직이 13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도 나뉘었고, 각각의 도청 소재지로 광주와 전주가 확정되었다. 이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선교부 설립을 논의하였다. 유진 벨(Eugene Bell)[배유지]은 나주를 전라남도의 선교 거점으로 삼으려고 시도하였지만, 나주 지역 주민들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반외세 감정으로 인해 선교부를 설치하지 못하였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되면서 세워진 목포선교부가 전라남도 선교의 출발지가 되었다.

1903년 후반부터 1904년 초반 목포 지역의 개신교인들의 전도 활동이 확장되면서 광주 인근에 세워진 외곽 선교처에 개종자가 많아졌다. 1904년에 유진 벨오웬(Clement C. Owen)[오기원], 스트래퍼(Miss Frederica Elizabeth Straeffer)[서여사]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양림산에 광주선교부를 세웠다. 1908년에 윌슨(Robert M. Wilson)[우일선]과 그레이엄(Miss Ella Iberia Graham)[엄언라]이, 1909년에 프레스턴(John F. Preston)[변요한]과 코잇(Robert T. Coit)[고라복] 부부, 1910년에 탈마지(John Van Neste Talmage)[타마자] 부부와 탈마지의 장모 에머슨(Mrs Amelia Janet Emerson), 매퀸(Miss Mary Anna McQueen)[구애라]이 도착하였다. 1911년에 뉴랜드(Rev. LeRoy Tate Newland)[남대리] 부부,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서로득] 부부와 딸 그리고 딸의 선생인 피취(Miss Harriet D. Fitch)가 부임하였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지속적으로 부임하면서 광주선교부는 안정적 틀을 갖추고 활동하게 되었다.

[광주선교부]

1904년에 광주선교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한 이후, 유진 벨오웬은 양림리에 여성들의 숙소와 학교, 사랑채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임시 사택을 건축하였다.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기념예배를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진 벨의 임시 사택에서 지역 주민들과 함께 드렸다. 이것이 광주에서의 첫 예배였으며, 양림리 교회의 시작이었다. 이후 광주선교부가 있는 양림리는 선교사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기독교 복음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 문화가 소개되는 중심지가 되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3년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의 선교 원칙에 따라 양림리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하였다. 당시 내한한 선교사들은 각 지역의 중심부에 선교부를 세우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였다. 이 세 기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가지 직능의 선교사가 필요하였다. 복음 전파를 담당할 목사 선교사, 치료를 담당할 의사 선교사, 교육을 담당할 교육 선교사, 아동과 여성을 전담할 여성 선교사, 이렇게 네 사람이 각 선교부에서 하나의 팀을 이루어 협력하며 활동하였다. 양림동에 자리 잡은 선교사들도 이런 직능을 가진 선교사로 구성되었다. 호남신학대학교 구내 선교사 묘역에 묻힌 선교사들도 이런 직능별 선교사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목사 선교사는 세 사람으로 전라남도 선교의 개척자인 유진 벨, 오웬, 폴 크레인(Paul Sackett Crane)[구보라]이다. 두 번째, 의사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 원장을 역임한 브랜드(Louis Christian Brand)[부란도]이다. 오웬은 목포선교부에서 재직할 당시 의사 신분이었다. 세 번째, 간호 선교사는 두 사람으로 광주와 군산, 서울에서 활동한 쉐핑(Elizabeth Johanna Shepping)[서서평]과 순천에서 활동한 텔마 썸(Thelma Barbara Thumm)이다. 마지막으로 아동과 여성을 담당한 선교사는 한 사람으로 광주수피아여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한 그레이엄이다. 이들 외에도 많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광주선교부 소속으로 교회와 학교, 병원에서 활동하였다.

광주선교부는 마가레트 벨(Margaret Whitaker Bell)[배주량]을 중심으로 1906년부터 양림리 교회양림동 선교부 주변을 배회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1907년에 여성과 아동 담당 선교사로 그레이엄이 도착하면서 교육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908년에 광주에 남학교와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광주남학교는 1908년에 광주숭일고등소학교[지금의 광주숭일중학교, 광주숭일고등학교]로 인가받았으며, 초대 교장은 프레스톤이었다. 1909년 양림동에 2층 학교 건물을 건축하여 1910년 완공하였다. 광주숭일고등소학교에서는 성경, 영어, 산술, 법제, 역사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1912년 시골 교회에 부설된 초등 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12칸의 온돌방을 둔 기숙사 시설을 마련하였다.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프레스턴의 사랑채에서 시작되어 광주여학교로 불렸다. 1910년 매퀸이 부임하였으며, 광주 지역에서 근대 여성교육의 터전이 되었다. 1911년 스턴스(M. L. Sterns) 부인이 여동생 스피어(Jennie Speer)를 기념하기 위해 준 기부금으로 양림동에 2층 건물을 신축해서 1층은 기숙사로 2층은 교사로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 광주여학교는 수피아기념여학교로 불리게 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여성 지도력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인물과 활동]

유진 벨

유진 벨은 목사이며 선교사로서 1868년 4월 11일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스테이션(Scott Station)에서 출생하였다. 유니온신학교와 루이빌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895년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896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광주를 거쳐 나주를 방문하였다. 나주에 전라남도의 선교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지역 주민의 반대로 설립하지 못했다. 1904년 2월 광주를 선교부 후보지로 결정하고, 3월에 오웬·프레스턴과 함께 광주로 답사 여행을 하였다. 유진 벨은 12월에 임시 사택 건축을 마치고, 12월 25일 11시에 사택에서 광주 주민과 함께 크리스마스 축하 예배를 드렸다. 이때 40여 명이 집 안에서 나머지 100여 명이 밖에서 예배드렸다. 이 예배가 광주에서 첫 개신교 예배이며 양림리 교회의 출발이었다. 1905년부터 유진 벨은 광주 지역 교회와 순회 구역 교회를 돌보았다. 1905년 11월 영구 사택으로 이사하고, 11월 20일부터 임시 사택을 평일에는 선교 진료소로 주일에는 예배 처소로 사용하였다. 1907년 성경학교와 지도자 훈련학교(Mission Training School)를 실시하고, 1908년 임시 사택에서 남학생 30명의 광주남학교와 여학생 20명의 광주여학교를 시작하였다. 1925년 광주 사택에서 사망하였으며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묻혔다. 유진 벨은 광주선교부 개설을 비롯해서 광주와 전라남도 선교를 개척하고 이끈 선구자였다. 유진 벨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두 명의 아내를 잃었다. 유진 벨의 딸 샬롯 벨(Charlotte Bell)과 사위 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은 전주와 대전, 광주에서 교육 선교를 하였다. 유진 벨의 자녀들과 손자들은 유진 벨 목사가 한국에 도착한 지 100주년 되는 날인 1995년 4월 4일 '유진 벨 100주년 기념재단(The Eugene Bell Centennial Foundation)'을 설립하여 북한에 식량 지원과 의료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오웬

오웬은 목사이며 의사 선교사로서 1867년 미국 버지니아주 블랙월넛(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버지니아주의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898년 한국 선교사로 부임하고, 1899년 목포선교부에 도착해 전라남도에서 최초로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하였다. 1904년 유진 벨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사하면서 의료 선교는 중단하고 복음 전도 사역에 전념하였다. 강진, 장흥, 보성, 순천, 여수, 구례, 화순 등 전라남도 동남부 지방을 순회하면서 지역 교회를 돌보았다. 1909년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오웬 사후인 1911~1912년에 오웬이 생전에 모은 3,000달러와 기부금 1,000달러를 모아 양림리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오웬기념각(Owen Memorial Hall)을 건축하였다. 오웬기념각은 당시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완공 후 6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여 겨울 성경학교와 부흥 사경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오웬기념각은 노회 집회 장소, 예배 장소, 선교부의 선교사 연례대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광주의 문화를 이끄는 중심지로 1920년 해삼위(海參崴)[[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동포연주단의 연주, 김필례 선생의 독창회, 수피아여학교「열세집」 연극 발표회, 광주YMCA 합창단의 발표회 등이 수시로 개최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기간에는 광주 주둔 미군의 막사와 영창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기독간호대학교의 강당과 예배 장소로 사용 중이다.

윌슨브랜드

광주의 선교 진료소는 1905년 11월 20일 의사 선교사 놀란(J. W. Nolan)유진 벨의 옛 사택에서 9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시작되었다. 1908년 윌슨이 부임해서 광주 진료소를 병원급으로 발전시켰다. 윌슨은 1912년에 그레이엄기념병원[Ella Graham Levine Memorial Hospital]을 신축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또한 병원 내 한국인 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간이 의학교를 운영하고, 병원 직원으로 채용함으로써 광주 청년들이 의료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윌슨은 1909년부터 선교사 사택 건축을 위해 벽돌을 굽던 방림동 가마터를 정리해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자체적으로 모금해서 선교 진료소 뒤에 3칸 기와집을 지어 10여 명의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였다. 1912년에 영국의 '극동과 인도구라협회'에서 기증한 5,000달러와 최흥종이 기증한 임야 1,000평[3,305.8㎡]에 40명이 치료받을 수 있는 광주나병원을 완공하였다. 1920년대에 600~700명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다, 1925년에서 1927년까지 2년에 걸쳐 전라남도 여천군 율천면 신풍리[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로 병원을 옮겼는데, 이것이 애양원이다.

1927년에 윌슨이 애양원으로 옮기고, 1930년에 브랜드 의사 선교사가 왔다. 브랜드는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와 군산과 전주 등지에서 순회 진료와 전도 사역을 하였다. 브랜드는 한국에 오기 전에 결핵과 치료법에 대해 광범위하게 공부했으며, 광주에서 결핵 치료에 헌신하였다. 브랜드는 화재로 소실된 광주기독병원을 새로 지었으며, 결핵 병동을 세웠다. 1938년 결핵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쉐핑

쉐핑은 간호 선교사로서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189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01년에 뉴욕주에 있는 성 마가병원 간호학교(St. Mark’s Hospital Nursing School)를 졸업하였다. 1912년에 광주기독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복음, 의료, 교육, 사회 분야에서 사역을 전개하였다. 1916년에 군산 구암병원[궁멀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17년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와 간호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간호학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1919년에 광주기독병원으로 다시 왔으며, 1922년에 여성을 대상으로 간역 양성학교를 설립하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남문밖교회[남대문밖교회] 부인들의 봉사활동을 위해서 '부인조력회(Woman's Auxiliary)'를 조직하였으며, 이후 수많은 교회에서 부인조력회를 조직하였다. 1923년에 이일성경학교(Stephen Neel Bible School)[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로 정식 간역학교를 시작하였으며, 한국간호협의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30년 광주에 돌아와 최흥종 목사와 협력하면서 부동교 다리 밑의 거지, 부랑아, 한센병 환자 등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특별히 버려진 수많은 여아를 구제하였으며 13명의 양녀를 입양했다. 쉐핑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던 무소유 선교사, 유능한 간호사, 넓은 시골 지역의 순회 선교사, 부인조력회의 조직자이며 책임자, 광주 이일성경학교 창시자, 광주의 직업여성들과 불쌍한 걸인들의 대모였다. 쉐핑은 1934년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광주 최초로 시민장으로 예우하였다.

그레이엄과 마가레트 벨

그레이엄은 아동·여성 선교사로서1869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마운틴울라(Mt. Ulla)에서 태어났으며, 노스캐롤라이주립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Greensboro)를 졸업하였다. 그레이엄은 목포선교부와 광주선교부의 최초 아동·여성 선교사였던 스트래퍼가 건강으로 인해 귀국한 후, 1907년에 파송되었다. 광주여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지만 바로 후임에게 넘겨주고, 광주 인근의 시골 교회를 다니면서 남자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여성들과 아동들을 돌보았다. 1930년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마가레트 벨은 교육 선교사로서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서 태어났으며, 군산에서 선교하던 윌리엄 불(William Ford Bull)[부위렴]의 여동생이었다. 1904년 첫 번째 부인을 잃은 유진 벨과 결혼하고 한국에 들어왔으며, 광주에 온 최초의 서양인 여성이었다. 1906년에 마가레트 벨은 유년주일학교를 시작하고, 1908년에 광주남학교와 여학교에서 가르쳤다. 또한 광주에서 개최되는 겨울성경학교에서 여자반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유진 벨과 자동차로 광주로 내려오다 병점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어비슨

어비슨(Gordon Avison) 선교사는 1933년 백운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 광주YMCA농업실습학교[어비슨농업학교]를 세웠다. 현대식 농사법을 교육하면서 농촌 부흥을 통한 한국 사회의 재건이라는 농업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의미]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양림동에 광주선교부를 설립한 이래, 양림동은 광주 지역에서 개신교와 서구 근대 문화를 도입하고 확산시킨 중심지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복음과 의료, 교육, 아동과 여성을 직능별로 맡아서 지역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고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서 광주 지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서구 근대 문화를 소개하고, 지역 인재를 양성하였다.

양림리 교회는 선교부 선교사들과 직원들, 광주숭일고등소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들과 학생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광주선교부가 있는 지역 교회로서 선교부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를 치르는 장소가 되었다.

선교사들이 개설한 선교 진료소인 제중원은 광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으로 이후 광주기독병원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광주기독병원에서 한국 최초로 한센병 환자를 진료하였다. 광주숭일고등소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광주에 처음 세워진 근대 교육기관으로 광주 지역의 인재를 양성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양림동에 뿌리를 둔 광주 개신교와 개신교인들은 광주 지역의 근대 시민사회 형성과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1970년대에서 199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5·18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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