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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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病專門病院光州癩病院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송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 있던 일제강점기 한센인 치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설립된 병원.
[개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은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도시가 그러하듯 식민 지배를 위한 일종의 기획 도시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때 광주를 비롯한 여타 도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한센병 환자, 즉 나병(癩病) 환자의 증가였다. 당시 국내 한센병 환자의 수는 관리기관의 공식적 통계에 의하면 대략 6,70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 한센병 환자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 숫자도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1931년의 신문기사에는 한센병 환자가 전국에 약 1만 8천 명 정도가 있을 것으로 예측한 기사가 실렸다.
[외국인 선교사의 의료 및 교육 사업]
한센병 치료의 역사에서 기억해야 할 점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이다. 외국인 선교사의 조직적인 지원과 헌신이 없었다면 구라사업(救癩事業)[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완쾌된 사람의 사회 복귀를 도모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업] 및 빈민 구제가 광주에서 대규모로 진행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신교계는 당시 해외 선교를 위해 많은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광주에도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외국인 선교사가 광주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광주가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지로 발전하고 인구가 증대했기에 가능하였다. 광주가 발전하자 개항장 목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외국인 목사들이 내륙으로 진출해 양림동에 터를 잡은 것이다. 지금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는 당시 살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흔적이 다수 남아 있다.
미국인 개신교 목사들은 양림동에 들어와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 의료 봉사 등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가장 먼저 광주에 온 사람은 유진 벨(Eugene Bell)[배유지] 목사인데, 유진 벨은 최흥종을 장로로 임명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유진 벨 이후 오웬(Clement Carrington Owen)[오기원], 윌슨(Robert Manton Wilsion)[우일선], 스와인하트(Martin Luther Swinehart)[서로득], 코잇(Robert Thronwell Coit)[고라복], 브랜드(Louis Chirstian Brand)[부란도], 그레이엄(Miss Ella Graham)[엄언라],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서서평] 등의 외국인 목사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외국인 선교사의 선교 행위는 교육과 의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의료 사업은 전근대적 의술체계에 의존하던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병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의료 사업은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근대적 의료 시스템을 통해 치료를 하고, 동시에 선교까지 할 수 있었으므로 병원은 선교의 중요한 거점이자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의학과 위생은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이 내세운 근대화의 중요한 영역이었으며, 미국의 선교사들에게는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분야였다. 근대화와 약자 구제 뒤에는 각각 일제의 식민지배 확립과 선교사들의 포교라는 서로 다른 목적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식민지 조선은 일제의 의료 시스템과 미국인 선교사들의 선교 의료가 경쟁과 협력을 함께 하는 곳이었다.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은 조선총독부의 통치전략과 외국인 선교사의 의료 선교, 그리고 최흥종을 비롯한 조선 시민단체의 구라사업이 모두 일치하는 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최흥종과 구라사업]
최흥종[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및 6.25전쟁을 거쳐 1966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약자와 빈자의 편에 서서 살았으며, 특히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최흥종은 기행과 기언으로도 유명한데, 자기 스스로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건은 유명하다. 최흥종의 호 오방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해명되지는 않았다. 최흥종의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최흥종의 희생과 봉사정신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최흥종이 한센병 환자 구호에 뛰어든 것은 외국인 선교사와 관련된 인상적인 경험을 통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던 최흥종은 김윤수와 함께 1904년 12월의 어느 날 포사이드(Wiley Hamilton Forsythe)[보위렴]라는 의료 선교사를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효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포사이드를 만나 함께 광주로 오는 도중에 일행은 추위에 떨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보았다. 최흥종은 김윤수와 효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미 한센병 환자를 만났었지만 두 사람은 외면하고 지나쳐 버렸었다. 한센병 환자는 누구도 가까이 하기를 꺼렸던 위험한 존재였으므로 두 사람의 행동은 당시로선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포사이드는 길가에 있는 환자를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에서 내려 눈 위에 짚을 깔고 앉아 있는 한센병 환자에게 다가갔다. 포사이드는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환자에게 건네주었고, 말에 태워 광주까지 데려와 치료를 해 준 것이었다.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에게 베푼 선행에 충격과 감화를 받은 최흥종은 이후 과거의 무절제한 삶을 버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 한센병 환자를 구제하는 데 자신의 남은 인생을 바친다. 여기서 포사이드가 베푼 행동은 성경 누가복음에서 전하는 착한 사마리안의 이야기와 구조가 비슷하다. 포사이드의 선행으로 한센병 환자에 대한 인식이 다소 개선되면서 한센인에 대한 체계적인 치료의 기틀이 놓이게 되었다. 최흥종은 이후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그들을 돌보는 데 헌신하였다.
광주 제중원 원장 윌슨[우일선]은 한센인 치료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영국의 '극동과 인도구라협회'의 지원을 받아 1912년 광주나병원을 설립하고 21명의 환자를 수용하였다. 광주나병원의 운영은 환자들의 자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부식물이나 고기 등은 각자 개별적으로 생산하였고, 건물의 보수 등도 환자들이 직접 해결하였다. 광주나병원에서는 환자들을 성별에 따라 분리 수용하였다. 남자는 2평[6.6㎡]의 병사 4실에 각 1실마다 6명이 사용하고, 여자는 14평[46.3㎡]의 병사 2실에 각 1실마다 5명이 수용되었다. 부부 환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14평의 부부실에 수용되었다.
광주나병원은 1912년에 남자 환자용 1동, 여자 환자용 1동을 증축하여 총 10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 이후 선교 의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통치가 어려워졌다고 느낀 조선총독부에 의해 많은 압박을 받아 1919년 사립병원 자격이 상실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23년 새로 사립병원으로 인가를 받는데, 이 무렵 광주나병원의 수용 환자는 7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는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에 비해 수용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입소하지 못한 환자들도 많았다. 이들이 도시를 배회하면서 사회 문제가 되었고, 시민들은 광주나병원의 이전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결국 1926년 11월 조선총독부의 강제 이전 명령이 내려지자 광주나병원은 여수군 율촌면[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으로 옮기게 된다. 1927년 자신의 이름을 거는 조건으로 건물을 지어주기로 한 사업가 비더울프(Biederwolf)의 이름을 따서 '비더울프 나병원'이라 하였으며, 1935년에는 '애양원'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항의와 구라 대행진]
최흥종은 증가하는 한센병 환자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이 거세지자 조선총독부에 대책을 마련해달라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묵살당한다. 그러자 최흥종은 결국 한센병 환자들을 데리고 조선총독부를 찾아갈 결심을 한다. 이 사건이 바로 세간에 전해지는 '구라 대행진'이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신문기사 등을 종합하면 1931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최흥종은 한센병 환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환자들을 이끌고 경성으로 상경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모인 환자가 대략 150명에서 200명 정도라고 전한다. 그러나 기차 같은 교통편을 이용할 수는 없었으므로 한센병 환자들은 걸어서 총독부로 갔다. 일설에는 150명이 출발해서 서울에 도착하자 400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여론에 힘입어 1931년 9월 24일 '조선나환자구제회'가 설립되었고, 김병로를 좌장으로 하여 윤치호, 신흥우, 이종린, 한용운, 최흥종, 안재홍 등이 참여하였다. 그중에서도 최흥종은 한센병 환자 구제 활동을 위해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는 등 가장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정책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다. 근대국가로서 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원했던 일본은 한센병 환자들을 도시의 풍경 속에서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때 가장 쉬운 방법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의 이주와 격리였고, 그 결과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소록도에 병원을 세워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소록도에 '자혜의원'이 생기자 호남 지역 다수의 환자들이 소록도로 이주했으며,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조치시켰다. 한센병이 단시간에 근절될 수 있었던 것은 지배권력에 의한 한센병 환자의 이주와 격리라는 극단적 대책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에서 한센병 환자의 처우나 인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련 기록]
1931년 9월 8일자 『동아일보』에 「나병환자(癩病患者)의 애절(哀切)한 호소(呼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위 천벌병(天罰病)이라는 무서운 문둥병(癩病)에 걸려 신음하는 동포들로부터 가련한 하소연을 우리 사회에 보내어 일반의 동정을 자아내게 햇다.
그들은 전남 려수군 신풍리에 잇는 조선나병환자공제회에 수용되어 잇는 환자들로서 이번 그 공제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최흥종 목사를 대표로 경성에 와서 알에와 가튼 의미의 진성서를 일반사회에 제출하게 하얏다.
"우리들은 가정에서 륜리적 애정이 파괴되고 친구에게 우의적 교제가 두절되고 사회에서는 집단적 생활이 거절되고 또 종교에까지도 의식적 참배가 금지되어 인간이면서 인간의 지위가 아조 상실되엇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공제회에 수용되어 치료를 바드나 아즉도 전조선에 널려잇는 만여명의 동병자는 수용할 곳이 업시 이리저리 방황하야 멀정한 다른 동포들에게까지 병균을 전파하고 잇스니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 몃개인의 생명이 업서지는 것보다도 우리민족 전체의 장래성쇠가 우려되지 아니치 못합니다.
동포형제여 우리는 죽자해도 죽지 못하고 살자하니 갈곳이 업고 병을 고치자니 더욱 도리가 업습니다. 이 생사량난의 역경에 선 우리들을 좀 생각해주소서. 더욱 우리민족 전체의 장래를 위하야 좀 생각해주소서. 형제여 자매여 위정당국자여."
[한센병의 증상과 치료]
한센병은 흔히 피부의 염증과 발진으로 시작해 피부가 괴사하는 증상으로 이어진다고 알고 있다. 과거에는 한센병을 결절라(結節癩), 신경라(神經癩)로 나뉘어 불렀는데, 결절라는 습성이라고 하여 물병, 신경라는 건성이라고 하여 깡병이라고도 하였다. 한센병 경과 중에 나타나는 나성 결절성 홍반[나성 결절 홍반]을 한센병 환자들은 연단이라고 부른다. 과거 한센병 환자에게 마약 중독자가 많았던 것도 이 연단 경과에 따르는 극심한 신경통의 고통 때문이었다. 또한 손, 발의 장애인이 많은 것도 연단 때문이었다.
한센병균이 말초신경에 침입하면 지각 마비, 운동 마비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나성 결절성 홍반, 즉 나반응(癩反應)이 있을 때에는 그 고통이 특히 심하여 마치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아프다고 한다. 이를 자통이라고 하는데, 한센병이 치료되면서 자통도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근대 초기에는 한센병에 대한 치료제가 마땅히 없었고 구하기도 힘들었다. 대표적으로 대풍자[Chaulmogra] 열매를 들 수 있는데, 한센병 치료약이 없던 시절에 열대지방에서 야생하는 대풍자 열매의 기름을 복용 또는 정맥 주사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효과는 거의 없었다. 한센병은 항생제인 DDS(Diamino-Diphenyl Sulfone) 출현으로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DDS는 1941년 이래 한센병의 치료에 가능성을 주었고 지금도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는 약이다.
한센병은 전근대 시기에는 전염성에 대한 공포가 큰 질병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과학적 연구가 진행된 결과 전염력이 매우 약해서 일반인이 걸릴 경우가 거의 없다고 밝혀졌으며, 치료제의 발달로 이제는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또한 유전 질환이 아니므로 태아에게 유전이 되지도 않는다.
[소록도 자혜의원 설립]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한센병 관리를 위해 소록도에 자혜의원 설립을 추진하였고, 1917년 토지 수용 과정을 거쳐 병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1917년 4월에 병사가 건립되어 각 도의 한센인들이 자혜의원에 수용되었다. 이 당시 자혜의원의 규모는 다른 선교 나요양소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고, 치료보다는 부랑 환자의 단속과 수용이 목적이었다. 즉, 사회정화라는 당시 조선총독부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소규모로 진행되던 증축은 1926년부터 본격적으로 확장되어 1928년까지 130여 동의 건물이 신축 또는 증축되었다. 1929년 무렵 자혜의원의 수용 인원 규모는 750여 명 수준까지 올라갔다. 1933년부터는 국민성금을 모금하며 대대적인 개편을 하게 된다. 운영 목적도 치료와 함께 사회에 재진입하는 것을 추가해 '소록도갱생원'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전체적인 공사가 끝난 1940년 당사의 수용인원은 대략 6,100여 명에 이르렀다. 해방이후 한국인 원장이 부임하였으며 복지 개선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마련되며 지금[국립소록도병원]에 이르렀다.
[평가와 의의]
광주나병원 설립 과정을 통해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한센병 환자 현황과 그 치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센인 치료와 관련하여 광주에 터를 잡은 외국인 선교사들이나 최흥종 목사 등 한국인들의 활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전라남도 도민의 성금으로 설립된 한국한센복지협회 광주전남지부가 광주광역시 동구 남문로 634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센인의 진료와 치료 사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