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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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石錄-羅燾圭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고성혜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26년 - 나도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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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85년 - 나도규 사망 |
배경 지역 |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
성격 | 기행문 |
작가 | 나도규 |
[정의]
조선 후기 학자 나도규가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서석록(瑞石錄)」을 지은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1826~1885]의 본관은 나주이며, 전라도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면]에서 출생하였다.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제자로, 문집 『덕암만록(德巖漫錄)』 상·하 8권을 남겼는데, 「서석록」은 제7권에 수록되어 있다. 나도규는 43세가 되던 8월에 2박 3일간 고제극(高濟克)·고일주(高馹柱)·고긍재(高兢載)·정해기(鄭海琦)·고만주(高萬柱) 등과 함께 무등산을 등반하였다. 나도규는 평소 여행과 유람을 즐겼는데, 대표적으로 35세가 되던 해 2~3월에 유람한 서울 여행과 43세와 45세 때 두 차례의 무등산 유람을 들 수 있다. 서울 여행담은 『덕암만록』 제6권의 「서행일기(西行日記)」에 실려 있고, 두 차례의 무등산 유람에 대한 기록은 제7권의 「서석록(瑞石錄)」과 「서석속록(瑞石續錄)」 등에 실려 있다.
[구성]
「서석록」은 크게 유산의 시기, 동행자, 무등산의 형상을 설명한 내용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정은 증심사, 학수치, 사인봉, 백토현, 장불치, 입석대, 서석대, 상봉, 오공너덜, 석문, 광석대, 천제단, 백토현의 순서로 기록하였다.
[내용]
나도규는 「서석록」에 무등산을 오르게 된 동기를 확실히 언급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유산 시기와 동행자의 이름을 설명하고 있다. 증심사에 도착한 나도규는 학수치, 사인봉, 백토현, 장불치를 거쳐 입석대에 도착한다. 나도규는 입석대의 장관을 표현하면서 "선관(仙官)의 옥홀(玉笏)"과 "석불(釋佛)의 지팡이"인 듯하다고 하였다. 서석대에 가서는 "여산(廬山)[중국 장시성과 구강현 남쪽에 있는 산]의 안탕(鴈蕩)[저장성 낙청과 평양의 두 현 경내에 있는 산]의 일이 기억났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특징]
나도규는 「서석록」에서 증심사부터 백토현에 이르는 등반을 기록하며 무등산의 뛰어난 경치를 묘사하는 동시에 자신의 의견과 생각 등을 적고 있어 인상적이다. 나도규는 불교, 천제단에서 무작정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 무등산 석벽에 이름을 새기는 것 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함께 무등산을 영험한 산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나도규는 19세기 중후반을 살았던 정통 유학자이다. 나도규가 살았던 시기는 봉건사회에서 근대기로 향하는 변모의 시기로, 유산기를 통해서 이러한 상황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의 유산기가 대부분 단편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서석록」은 장편에 해당하여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