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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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言論出版 |
영어공식명칭 | Journalism and Publication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은진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지역 언론·출판의 역사와 현황.
[개설]
언론과 출판의 역사는 당시 우리나라가 처해 있었던 사회·경제·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시대에 따라 광주 지역의 신문, 방송, 출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다루었다.
[신문]
지역 신문 태동기[1945년 이전]
지역민들에 의한 본격적인 지역 신문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신문이 도입되었던 시기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기 전까지 광주 지역에 순수한 지역 신문의 출현은 없었고, 서울에서 발행된 신문들의 지사 체제로 언론 활동이 전개된 것이 고작이었다. 1910년에 『광주신보』가 창간되고, 1941년에 일제가 강제한 '1도 1사' 언론 정책의 산물로 『전남신보』가 등장하였으나, 이 신문들은 일본이 자신들의 식민 지배와 상업적 목적을 위해 발행한 일본어 신문이었다.
지역 신문 형성기[1945년 광복 이후]
광주 지역에서 신문이 모습을 나타낸 시기이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신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지역민들의 신문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 시기에는 신문과 같은 공식적인 커뮤니케이션 통로와 수단에 대한 일제의 봉쇄가 풀리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좌우 세력의 첨예한 갈등으로 신문이 형성 초기부터 정치 이념에 휩쓸리고, 그 생명이나 지속성도 정치적 변화에 예속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를 낳았다. 광복 직후 광주 지역에서는 『전남신보』[뒤에 『호남신문』으로 바뀜], 『조선중보』[뒤에 『광주신보』로 바뀜], 『광주민보』[뒤에 『동광신문』으로 바뀜], 『건국특보』, 『건국신문』 등이 창간되어 본격적인 지역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
지역 신문 정리기[1948~1960년]
미군정 이후 지역 신문들이 자리를 잡게 된 시기이다. 1948년 8월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 우파 세력들이 사회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이는 언론 구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미군정을 비판하고 단독 정부에 반대했던 진보 신문이나 좌파 계열 신문들이 모두 사라졌다. 광주 지역 또한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언론 구도 위주로 재편되었다. 6.25전쟁 이후 『호남신문』과 『광주신문』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고, 보수 우익을 표방했던 『동광신문』이 폐간되고, 대신 『전남일보』가 창간되었다. 195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광주 지역 언론을 대표했던 『호남신문』과 『광주신보』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전남일보』가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 9월 『전남매일신문』이 창간되어 광주 지역의 언론은 이들 두 신문이 주도하게 되었다.
지역 신문 쇠퇴기[1961~1979년]
1961년 5.16군사정변과 1972년 유신체제로 신문이 크게 위축되었던 시기이다.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처음부터 정치적 정통성을 얻기 위해 언론 장악을 전개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선도하는 언론을 요구하였는데, 언론들은 정부에 대한 비판보다 정부가 추진하는 근대화 작업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고 근대화 대열에 참여하도록 계도하는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광주 지역 신문의 구도도 크게 바뀌었다. 광주 지역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호남신문』과 『광주신보』가 폐간되었고,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만 남았다.
지역 신문 침체기[1980~1987년]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제5공화국 정권 하의 단일 신문기(單一新聞期)이다. 1980년대는 우리나라 언론 사상 가장 불행했던 시기로 기록되고 있다. 언론이 군부의 살육 현장을 목격하고도 보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물론, 군부의 물리적인 언론 탄압을 그대로 수용하고 만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이후 군부는 여론 통제를 위해 언론 장악 기도에 들어갔다. 광주 지역 신문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신문 유지에 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문들은 결국 '사회가 원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는 언론은 필요가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발행을 중단하였다. 광주 지역 신문들은 다시 6월 2일자로 복간했지만, 이전의 신문 구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언론 통폐합과 일도일지(一道一紙) 원칙에 따라 2개 일간지의 경쟁 체제가 없어지고 1개지 단일 체제가 되었다.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 합쳐져 『광주일보』로 창간되었으며, 『광주일보』 단일 신문 체제가 이어지는 동안 신문에 대한 광주 지역민들의 기대와 신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따라서 1980년부터 1987년까지 광주 지역에서는 비공식 매체인 전단 또는 간이 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역 신문의 재부흥기[1988년~현재]
제5공화국 정권의 종식과 「언론기본법」의 개폐에 따라 신문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확보된 시기이다. 1987년 6월항쟁은 제5공화국 정권으로 하여금 언론 탄압의 제도적 장치였던 「언론기본법」의 개정 폐지를 선언하게 만들었다. 언론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위상을 법적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다. 광주 지역의 신문 구도도 이에 따라 큰 변화를 보였다. 새로운 신문들이 속속 창간되어 광주 지역의 '다신문 시대'를 열었다. 신문의 창간이 신고제로 바뀌면서 광주에서는 기존 『광주일보』 외에 4개의 일간 신문이 새로 나왔다. 1988년 이후 『무등일보』,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광주매일』이 창간됨으로써 모두 5개 신문들의 경쟁 체제가 이루어졌다.
[방송]
국영 방송 출범[1948~1960년]
광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방송 체제는 국영 방송 네트워크 형태였다. 1948년 이승만에 의한 남한 단일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부는 미군이 넘겨준 전국 방송국을 국유화하였다. 광주방송국[KBS]도 그러한 체제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광주 지역의 국영 방송 체제는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물러난 1960년까지 지속되었다.
국영·민영 방송 체제의 성립[1961~1980년]
광주 지역의 방송은 1961년 기독교 광주방송[광주 CBS]이 개국함으로써 국영·민영 혼합 체제로 들어서게 되었다. 기독교 광주방송이 종교 방송으로 시작된 만큼 엄밀하게 보자면 민영 방송은 아니었지만, 광주 지역에 민간이 운영하는 방송의 가능성을 열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1963년 광주문화방송[MBC]이 개국하여 본격적인 국영·민영 방송 체제가 이루어졌다. 이후 1971년에 전일방송[VOC]이 가세함으로써 국영·민영 방송의 각축 시대에 접어들었다.
공영 방송 체제[1980~1987년]
20여 년 동안 국영·민영 방송 체제가 지속되어 오다가 1980년 언론 통폐합 조치로 공영 방송 체제로 일원화되었다. 모든 방송 기능과 운영권을 KBS로 통합시킴으로써 광주 지역의 민영 방송은 소멸되었다. 기독교 광주방송이 유일하게 남았으나 그것도 종교 방송만 하도록 함으로써 특수 방송 기능에 머물렀다.
공영·민영 방송 체제[1987년~현재]
7년이 넘게 유지되어 온 공영 방송 체제는 비민주적 운영과 방송 기능의 저하로 사회적 비판에 밀려 부분적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1987년부터 기독교 광주방송의 기능이 종전의 민영 방송 형태로 환원되고, 1995년에는 상업 방송인 광주방송[KBC]이 개국하게 되어 공영·민영 체제로 바뀌었다. 거기에다 유선 방송인 KCN[광주케이블TV네트워크]과 KCTV[한국케이블TV광주방송]가 이미 1995년 초부터 방송을 시작함으로써 민영 영역이 더욱 확대되었다.
[출판]
일제강점기[1910~1945년]
일제는 민족의식 고취에 영향을 미친다고 1910년 이전에 압수한 서적을 포함하여 『초등 대한역사』 등 총 51종을 발매·반포 금지와 압수 처분을 하였다. 「신문지법」[1907], 「출판법」[1909], 「출판사업령」[1943]을 만들어 한국의 출판 활동을 탄압하였다. 원고 내용을 사전 검열하고 출간 후에도 삭제가 행해졌다. 광주 지역에는 광복 전에 5개의 인쇄소가 운영되고 있었다.
미군정기[1946~1948년]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등이 폐지되어 1946년에는 신문, 잡지, 도서가 아무런 제재 없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남한에만 1949년까지 798개의 출판사가 생겨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광복 이후 1949년 1월까지 1,683종의 도서가 출판된 것으로 나타났다. 광복 후 광주에서는 일본인이 경영했던 인쇄소가 『동광신문』이 되고, 일본인이 경영했던 『전남신보』는 『호남신문』이 되었다. 당시 『동광신문』 주필 고영환은 『청은만필(靑隱漫筆)』을, 『호남신문』 사장 이은상은 『이충무공 일대기』를 발간하였다. 이은상은 『호남신문』 지상에 「대도론(大道論)」, 「노변필담(爐邊筆談)」, 「민족의 맥박」 등을 연재하고 이를 단행본으로 냈다. 그 외에 1950~1960년대 출판물로는 『전남산업개황』[1954], 『광주학생독립운동사』[1956], 『전남사정록(全南事情錄)』[1957], 『광주지(光州誌)』[1964], 『다산경학사상연구』[1966] 등이 있다.
대한민국 수립기[1948~1960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공포되고 출판 등록 규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출판물의 수가 대폭 줄었으나 종전 후 출판사가 속출하였다. 1950년대의 출판 동향은 대중화 단계에서 특색을 찾을 수 있다. 이전에는 서점 공급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간행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출판업계가 경영의식의 변화로 방문 판매 공급을 시도하게 되었다. 광주의 경우 6.25전쟁 전후 인쇄소가 10개소 있었는데, 광복 전에 비해 두 배에 머물러 지역 출판 인쇄의 부진함이 나타났다.
제3공화국[1961~1980년]
군부는 무실적 출판 정비에 착수하여 서울 272개, 지방 366개 출판사를 등록 취소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국제수지와 국민생활의 안정으로 출판의 대중화 단계가 굳어져 갔다. 이때 규모가 큰 출판사들의 전집물 기획 열기가 절정에 달하였고, 단행본과 문고본 출판이 활기를 띠었다. 방문 판매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출장 판매, 지역 판매가 정착되었고 지사 직영 및 지사 판매 제도가 뿌리 내렸다. 광주에서도 1970년대부터 인쇄소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98개소의 인쇄소가 운영되었고, 이후 5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하면 열악한 상태였다. 1967년 이후 출판계가 틀을 잡아가면서 출판 호황을 맞았음에도 광주 지역 출판만은 상대적으로 부진한 추세를 보였다. 이 무렵 출판 사정은 각급 학교의 교지 발간이 대부분이었고, 어쩌다가 시집이나 수필집이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문학지나 종합지가 더러 출간되기는 하였으나 지속되지는 않았다. 1970년대 말 출판사 현황 또한 영세하였는데, 당시 『전남일보』·『전남매일신문』 출판국, 전남교육, 호남문학사, 삼부출판사, 현대문화사 등 총 9개사가 있었는데, 연평균 3~4부 내지 5부를 발간하는 실정이었다. 광주에서는 이 기간 동안 『광주상공업현황』[1971]을 비롯 『전남교육 30년사』[1977], 『백의민족』[1972], 『광복30년사』 1·2·3권[1975], 『제일교회 70년사』[1976] 『무등산』[1976] 등이 나왔다. 한편, 이 무렵을 전후하여 문학 동인지 활동이 활발해져 문학 동인지 발간이 이루어졌다. 시조 분야의 『영산강』[1970], 『시조문예』[1977], 소설 분야 『소설문학』[1973], 아동문학 분야 『광주아동문학』[1974] 등이 출간되어 그간 침체되었던 향토 문학을 진작시켰다.
제5공화국[1980~1987년]
1980년대에 들어 그간 안정세를 보인 출판계도 불황에 빠졌다. 10.26사태, 12.12군사반란, 5·18민주화운동이 발발하였다. 불안한 사회 여건과 원유 파동까지 겹쳐 인쇄 매체는 경영 침체에 직면하였다. 1980년 문화공보부는 전국 출판사 가운데 617개 사를 무더기로 등록 취소하였고, 그 후 7년 동안 신규 출판사 등록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1980년대에는 한국학의 대두와 함께 지역 사회에 대한 관심이 고양되면서 향토문화 탐구에 관한 학술 총서가 눈에 띄게 다수 출간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각 대학 연구소와 국립광주박물관, 광주직할시, 전라남도 등 행정관서에까지 고루 파급되어 총서 붐을 야기하였다.
문민정부[1987년~현재]
1987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출판사 허가제가 신고제로 변경되었다. 그 이후 출판사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1996년에는 1만여 개 사를 넘어서게 되었다. 광주 지역의 출판사와 인쇄소가 각각 100개 사를 넘어선 시기도 1990년대 초부터이다. 출판사의 경우 1993년에 173개 사, 1994년에 200개 사, 1995년에 209개 사로 증가세를 나타냈는데, 대부분의 출판사와 인쇄사는 광주직할시 동구에 집중되었다. 이는 1980년대 중반 동구 남동에 출판·인쇄 거리가 출현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라남도청을 중심에 둔 남동 일대 출판·인쇄 거리의 인쇄 관련 업체는 총 500여 개 사에 이르렀고, 이 중 기획 단계를 담당하는 출판업이 50%, 직접 인쇄하는 곳이 30%, 제판업이 10%, 제본소가 6%, 기타 인쇄 재료를 취급하거나 간단한 인쇄물을 취급하는 곳이 4% 정도였다. 그리고 인쇄소는 1990년대 121개소, 1992년에 138개소, 1995년에 210개소로 증가하였다. 1987년 6.29선언이 있은 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르포나 학술 연구물이 경향 각지에서 쏟아져 나와 광주의 아픔을 재조명하기에 이른 것은 1980년대 출판사에 특기할 만한 사건이었다. 『5.18 광주민중항쟁 자료집』[1988], 『광주-그 비극의 10일간』[1988], 『광주, 비(秘) 시민항쟁』[1988],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1990] 등이 모두 광주 관련 출판물이다.
[의의]
광주 지역의 신문, 방송, 출판은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왔다. 다른 지역에 비해 느리게 발전한 감이 없지 않지만, 꾸준히 광주 시민의 생각을 대변해 왔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며 광주 시민이 갖게 된 아픔까지도 면밀히 담아내고자 노력해 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