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28
한자 四一九革命
이칭/별칭 4월혁명,4.19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상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0년 4월 19일연표보기 - 4.19혁명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60년 4월 26일연표보기 - 4.19혁명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 - 3.15부정선거
전개 시기/일시 1960년 3월 15일 - 민주주의 장송데모, 3.15의거
전개 시기/일시 1960년 4월 11일 - 3.15의거 당시 실종된 김주열 시신 발견

[정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전국민적 항쟁.

[개설]

4.19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집권 자유당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화로 획책한 제4대 대통령선거, 제5대 부통령선거의 부정에 맞선 광주·마산의 3.15의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세계 혁명사상 유일하게 순수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전국민 항쟁이며 시민혁명이다.

[역사적 배경]

이승만 정권은 종신 집권을 위한 발췌 개헌을 교두로 국회 사사오입(四死五立) 파동, 반대세력 폭력 탄압, 언론기관 폐쇄, 정치 사찰 등을 벌여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독재정권을 지향하였다. 한편으로 자유당 정권의 거듭된 경제정책 실패와 부패 만연으로 국민 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이로 인한 국민 분노는 극도에 다다랐다. 국민들의 민심에서 멀어진 자유당은 급기야 1960년 3월15일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정권의 영구화를 꾀하였다.

[경과]

1960년 3월 15일 선거 전야, 전라남도 민주당원과 시민들의 걱정은 투표장에서의 당원들과 참관인의 신변 문제였다. 3월 9일 여수 민주당원 피살사건, 3월 11일 광산 민주당원 피살사건은 투표 참관인의 추천까지 어렵게 하였고, 선거 분위기를 온갖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다.

3월 15일 아침부터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이 거부·축출당하였고, 어떤 곳에서는 부녀자가 투표통지서를 요구하자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는 보고 등이 잇달았다. 전라남도 광주시 77개 투표소는 대부분 100미터 이내에 자유당 완장 부대와 반공청년 부대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었고, 민주당원의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극도로 흥분한 민주당원과 시민들은 선거사무소로 모여들었고, 급기야 12시 45분 광주시 금남로4가 민주당 선거사무실 앞에는 1200명의 시민까지 합세하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첫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유혈진압당하였고, 이 사실이 민주당 중앙본부에 보고되었으며, 전국으로 즉시 퍼져나갔다. 전라남도 광주시 금남로의 '곡(哭) 민주주의 장송데모'는 오후 3시 40분경 3.15의거[3.15 마산 의거]로 이어졌다.

4월 11일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떠오른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4월 19일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 및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이루어졌으며,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은 4월 26일 하야하였다.

[결과]

4.19혁명은 3.15부정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의의와 평가]

4.19혁명은 민권 수호 및 주권의식이 드러나는 역사의 장이었으며,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4.19혁명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하였다.

[참고문헌]
  • 국립4.19민주묘지(https://www.mpva.go.kr/419/index.do)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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