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3213 |
---|---|
한자 | 天主敎 |
영어공식명칭 | Catholic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옥 |
[정의]
전라도 광주 지역의 천주교의 변천.
[변천]
1926년 5월 16일 전라도 광주 내 관공리들과 상인 10여 명이 나주 노안면 양천리 주임 신부 박재수 신부를 초청하여 정미소에서 조선인을 위한 첫 미사를 진행하였는데 이때 즉석에서 광주교회 설립 기금을 모금하며 광주교회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1930년 7월에 광주 북동에 성당 부지 300평[992㎡]을 매수한 후 여러 신부의 원조를 받아 공소(公所)를 세우고 박재춘, 임 클라라 내외를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여 선교에 힘쓴 결과 1932년에는 100여 명의 신자가 교회를 찾게 되었다. 1933년 5월 29일에는 대구 교구장 안 주교가 광주 초대 주임 신부로 민정호 신부를 임명하여 광주에도 신부가 주재하게 되었다. 대구 안 주교는 1934년 4월 10일부로 초대 광주 감목대리로 오웬 맥폴린 신부를 임명하였다.
맥폴린 신부는 1936년 광주교회가 교구로 승격된 뒤 벽돌집 형식으로 사제관을 세웠고, 1937년 10월에는 광주 북동에 벽돌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38년 6월 광주북동천주교회를 완공하였다. 1938년에는 정 신부가 광주북동천주교회의 제5대 주임 신부로 임명되면서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훌륭한 사제관과 성당을 갖춘 신도 400여 명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외국인 신부들을 감금하고 조선인 신부들은 군대로 징집하였다. 이때 광주 교구장이었던 맥폴린 신부가 연금 상태에 있어 교구 행정이 마비되던 중 1942년 12월 11일 로마 교황청의 임명을 받아 일본인 와키다 신부가 광주 교구장으로 취임하였다. 와키다 신부는 일본인이었지만 교리에 철저한 천주교 신부였으며, 수난을 겪고 있는 조선 천주교를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와키다 신부는 교구청을 광주로 옮기기 위해 광주북동천주교회 사제관을 증축·보수하였고, 1943년 말 교구청을 광주북동천주교회 사제관으로 옮기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말 당시 일본은 교회에 대해 직간접으로 무리한 요구와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럴 때마다 와키다 신부는 총독부, 헌병대, 군사령부를 찾아다니며 사건 해결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징집 대상에서 광주북동천주교회가 제외되었을 정도로 와키다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와키다 신부가 일요일 미사 강론을 일본어로 통역하여 강론하면서 천주교회를 찾는 신자들이 줄어들어 100여 명의 신도만 남았다.
광복이 되자 로마 교황청은 다시 맥폴린 신부를 제3대 광주 교구장으로 임명하였고, 강 신부를 광주 제10대 본당 신부로 임명하였다. 1957년 광주 교구는 대목구로 승격하였고, 대목구장으로는 해럴드 신부가 임명되었다.
[교육 및 기여]
광주 지역 천주교는 1962년 3월 7일 대건신학교[지금의 광주가톨릭대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교육에 힘썼으며, 1973년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제7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광주 지역 천주교는 5.18민주화운동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특히 윤공희 대주교는 5.18민주화운동 사건을 알리고 진실을 밝히는 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