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0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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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處精 載寧李氏 孝烈閣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비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달창로 429[본말리 66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동락 |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에 있는 김처정과 재령이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선 후기의 정려각.
[건립 경위]
김처정·재령이씨 효열각(金處精載寧李氏孝烈閣)은 효자 김처정(金處精)[1623~1670]과 그의 손자 김여탁(金汝鐸)의 처 열녀 재령이씨를 위해 건립되었다. 김처정은 청도 사람으로 30년 동안 지병을 앓던 부친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부친의 병세가 악화되자 인근 마을을 다니며 사람 젖을 얻어 봉양하였다. 재령이씨는 김처정의 손자며느리로 아이를 출산한 후 이미 사망한 남편을 따라 식음을 전폐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699년(숙종 25) 김처정과 재령이씨에게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위치]
김처정·재령이씨 효열각은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 개백마을 남서쪽 도로 좌측에 위치한다. 도로 너머 서쪽에는 달창 저수지가 있다. 1699년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강정]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1799년(정조 23) 달성군 현풍읍 대리[솔례], 1928년 달성군 유가읍 유곡리 차천 상류, 1978년 달성군 유가읍 유곡리 차천 하류, 2004년 달성군 유가읍 금리 780-5번지로 이건되었고, 2011년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형태]
김처정·재령이씨 효열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방은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남쪽에 맞배지붕의 출입문이 있다. 효열각 내부 좌측 칸에 ‘효자 증별검 청도 김공 휘 처정지려(孝子贈別檢淸道金公諱處精之閭)’, 우측 칸에 ‘열부 청도 김공 휘 여탁지처 유인 재령이씨지려(烈婦淸道金公汝鐸妻孺人載寧李氏之閭)’ 현판이 있다. 현판 좌측에는 정려와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정려 현판은 모두 가로가 긴 세장방형의 형태이다.
[금석문]
1. 김처정 정려
앞면에는 '효자 증별검 청도 김공 휘 처정지려(孝子贈別檢淸道金公諱處精之閭)'라 적혀 있다. 전면 좌측에는 다음의 내용이 적혀 있다. “효자 김처정은 일찍 행실이 뛰어나 천거하는 글에 이름이 들어갔다. 부친께서 고질병이 있어 30년 간 시탕하니 한결같이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느 날 부친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음식도 먹지 못하고 인유(人乳)만 먹은 것이 이십여 년이나 되었다. 항상 의복을 유녀에게 나눠 주고 직접 나아가 울면서 젖을 얻어 한 번도 끊어지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친이 하루는 메추리를 먹고 싶다 하여 그것을 구하려 할 때 매가 메추리를 잡아 집 앞에 던져주었다. 의원이 말하기를 노루고기가 가장 좋다고 하니 홀연히 사냥꾼이 노루를 지고 와서 순제라고 불렀다. 그 일이 알려져 숙종 기묘년[1699년]에 정려를 내리니 사실이 『포산지』에 실려 있다.[夙著行義累入薦書父有/病疾侍湯三十年至誠如 一日父病轉劇只服人乳/者垂二十餘年常以衣服 散給遠近乳女親詣泣乞 未嘗乏絶父於一日欲嘗 鶉実忽有飛鷂掠鶉墮庭 醫云獐肉最良忽有獵者 負獐而至號 純齊事聞 肅廟己卯褒旌贈氷庫別 檢事載苞山誌]" 맨 끝에 '이천사년 갑신 하지절 중건(二千四年甲申夏至節重建)'이라 기록되어 있다.
2. 재령이씨 정려
앞면에 '열부 청도 김공 휘 여탁지처 유인 재령이씨지려(烈婦淸道金公諱汝鐸之妻孺人載寧李氏之閭)'라 적혀 있다. 전면 왼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남편이 죽은 뒤에 유복자를 위해 참으며 죽지 않고 출산 후에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여 뒤를 따랐다. 그 일이 알려져 숙종 기묘년[1699년]에 정려를 내리니 사실이 『포산지』에 실려 있다.[夫死之后爲其遺服 隱忍不死及其解胎 不食自盡事聞 肅廟己卯褒旌事載苞山誌]" 맨 끝에는 '이천사년 갑신 하지절 중건(二千四年甲申夏至節重建)'이라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김처정·재령이씨 효열각은 효자와 열부에 관련된 정려각으로 후세 사람들의 교육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