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달성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348
한자 古代[達城郡]
영어공식명칭 ancient tim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김호동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달성 지역의 역사.

[삼한 시대의 달성]

달성 지역은 청동기 문화가 발전하면서 주민의 수가 늘어나고 사회 분화가 진행되면서 몇 개의 지역 집단으로 나누어졌으며, 점차 소국[성읍 국가] 단계로 성장하여 삼한 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다. 현재 그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보이는 탁순국(卓淳國)을 화원 일대에 비정하는 설이 나와 있다.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달성]

삼국 시대 및 통일 신라 시대에 신라가 팽창하면서 대구 지역의 소국들은 늦어도 5세기 말~6세기 초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생각된다. 108년(신라 파사 이사금 29)에 병합한 다벌국(多伐國)은 곧 대구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대구 지역에 있었던 소국은 '달구벌국'이며 지금의 달성 지역은 달구벌국의 읍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8년(신라 내해 이사금 13)의 경우 신라에 달구벌국이 병합되면서 달성 지역은 신라의 영토로 되었다. 그 뒤 신라의 지증왕(智證王) 대 이후 영토의 확장에 따라서 주(州)·군(郡)·현(縣)을 설치하였고, 중요한 거점에는 소경을 설치하였다. 이처럼 신라의 지방 제도는 9주 5소경의 설치와 군현 제도의 실시에서 근간을 삼았으며 이는 신문왕(神文王) 대에 갖추어졌다. 주는 신라가 영역을 확대하면서 중요한 땅에 설치하였으며 때로는 전략상 이전하기도 하였다. 9주 5소경이 정비되었을 무렵의 달성은 삽량주(揷良州), 즉 양주(良州)에 속한 수창군의 영현이었던 하빈현(河濱縣)과 화원현(花園縣), 화왕군(火王郡) 영현이었던 현효현(玄驍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고대 달성의 행정 구역]

달성을 포함한 대구 지역의 군현을 현재의 대구광역시역과 결부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대구 분지의 중앙을 관류하는 신천을 경계로 그 동쪽은 위화군의 군치 지역이었으며, 신천의 서쪽은 달구화현(達句火縣)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금호강을 경계로 팔송산 기슭에 해당하는 그 동북쪽의 동촌 지역 일원은 압량군 치성화현으로 편성되었으며, 현재 화원 지역은 설화현(舌火縣)이었고, 하빈 지역은 다사지현(多斯只縣), 칠곡 지역은 팔거리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각각의 군현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지 외관조에 규정된 바와 같은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군에는 군 태수 1인과 외사정(外司正) 1인이, 현에는 현령(縣令)[혹은 소수] 1인이 파견되어 그 지역 출신 촌주들의 도움을 받아 지방 지배를 실현해 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757년(경덕왕 16) 전국적인 지명 개정에 따라 수창군(壽昌郡)[위화군의 개명]·하빈현[다사지현의 개명]·해안현(解顔縣)[치성화현의 개명]·화원현[설화현의 개명]·현효현[추량화현에서 개명]으로 고쳐졌다. 또, 수창군하빈현·화원현을 영속하였으며, 해안현은 장산군(獐山郡)[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에 영속되었고, 현효현은 화왕군[지금의 경상남도 창녕군]에 속하였다. 왕경에는 성씨가 있었고 달성 지역에는 성씨가 없었는데, 940년(태조 23)에 지방 세력을 공신으로 제정하여 성씨가 사여되었다. 특히, 현효현에는 지방 군단인 10정의 삼량화정(參良火停)이 설치되어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한편, 839년(문성왕 1)에 김우징(金祐徵)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곳 달구벌 전투에서 승기를 잡아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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