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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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甄萱 |
영어공식명칭 | Kyun Hwon |
이칭/별칭 | 진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손경희 |
[정의]
후삼국시대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전투에서 고려 태조 왕건과 싸워 승리한 후백제의 시조.
[개설]
견훤은 후백제를 세워 통일신라, 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무장이다.
[가계]
견훤(甄萱)의 재위 기간은 892~935년이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이씨(李氏)였으나, 후에 견(甄)으로 바꾸었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광계(光啓) 연간에 사불성(沙弗城)[지금 경상북도 상주시] 을 차지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했다. 아자개의 가계가 적혀져 있는 『이제가기(李碑家記)』에 의하면 “아자개의 첫째 아내는 상원부인(上院夫人)이고, 둘째 아내는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의 맏아들은 상보(尙父) 견훤이고, 둘째 아들은 장군 능애(能哀)이며, 셋째 아들은 장군 용개(龍蓋)이고 , 넷째 아들은 보개(寶蓋)이며, 다섯째 아들은 장군 소개(小蓋), 딸은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적혀 있다.
[활동 사항]
1. 후백제 건국
진성여왕 시기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은 몰래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행군하여 서울 서남쪽 주현(州縣)을 공격했다. 이르는 곳마다 빨리 호응하여 한 달 사이에 무리가 5천 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무진주(武珍州)를 습격해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고 스스로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이라 서명하니 889년의 일이다. 이때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良吉)이 가장 강성하였기에, 궁예가 스스로 투항하여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양길에게 관직을 주어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그 백성들이 환영하고 위로하였다. 견훤은 900년(효공왕 4)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직을 마련하였다.
2. 후백제와 공산전투
901년(효공왕 5) 견훤이 대야성[현재 경상북도 합천군 합천읍]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20년에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견훤은 신라왕이 왕건에게 군대를 요청한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925년(태조 3) 견훤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니 태조도 정병을 거느리고 와서 승패를 겨루었다. 그때 견훤의 군사가 대단히 날쌔었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927년 9월 견훤이 근품성(近品城)[현재 경상북도 영천시)을 습격하고 신라 수도 교외에 이르니 신라왕이 왕건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왕건이 군사를 출발시키려 하는데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지금 울산광역시 울주군]를 습격해 빼앗고, 시림(始林)으로 진군했다가 갑자기 신라 왕도로 들어갔다. 견훤은 강제로 경애왕의 부인을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경순왕]에게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런 후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신라의 보배와 병기, 자녀, 기술이 좋은 모든 장인을 잡아 직접 데리고 돌아왔다. 견훤은 공산(公山)[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아래에서 왕건의 정예 기병 5천 명과 크게 싸웠다. 견훤의 부대는 왕건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을 죽이고 공산전투에서 승리했다.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현재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약탈하고 부곡성을 빼앗았다. 한편 의성부(義成府)의 태수 홍술(洪述)이 견훤을 맞아 싸우다 죽었다. 견훤은 공산전투를 대승리로 장식하여 경상도 지역을 석권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성주시와 칠곡군으로 진출하여 고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3. 후백제 멸망
견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 십여 명이 있었다.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해 그에게 왕위를 전해주려고 했다. 견훤은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자식들의 싸움에 휘말려 큰아들 신검(神劍)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도망쳐 고려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왕건으로부터 상보(尙父)라는 칭호를 받고 양주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곧이어 왕건과 함께 일리천에서 후백제와 싸워 936년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묘소]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1번지에 견훤의 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공주목 은진현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견훤의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