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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계교의 가설로 많이 변했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D010102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어경선

1930년대에 철도와 도로망이 개설된 후 수운을 기반으로 성장해 가던 남한강 주변의 많은 포구들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목계는 나름대로 새로운 변신을 하며 시대적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6·25전쟁 이후까지도 수운의 기능을 유지하였다. 1960년대 초 팔당댐 공사로 수로가 막히기 전까지는 돛단배가 오르내렸고 강원도 정선 등에서 생산된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는 뗏목은 수시로 내려갔다. 목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됫섬과 여우섬 주위의 돌을 깨서 수로를 만들고 돛단배와 뗏목이 내려갈 때마다 골삯을 받아 마을 기금을 모았다.

또한 도로의 건설로 수운이 위축되긴 했지만 목계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목계나루를 통해 단양, 제천, 원주에서 장호원, 이천,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길목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할 수 있었다. 이 길은 당시 지역 경제의 중심지였던 인근 장시와 맞물려 더욱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예를 들면 제천장과 내창장의 소들이 장호원장과 이천장을 거쳐 서울의 마장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목계나루를 건너야 했고 이를 위해 목계에는 마방(馬房)도 있었다.

특히 목계나루에는 트럭이나 버스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찻배가 있었고 여객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는 50~60명을 태울 수 있는 큰 배와 20~30명을 태울 수 있는 작은 배가 있었다. 이와 같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할 때는 음식점, 여관, 주막, 마방, 권번집 등이 즐비했을 것이다. 6·25 전쟁 때 마을이 폭격을 받은 이후, 전성기의 기와집과 2층집이 길 양쪽으로 즐비했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그 모습들이 일부 남아있었다고 한다.

목계의 이러한 변화를 초래하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1972년 충주 지역에서 바다를 구경할 수 있었던 대홍수 때문이다. 이때 마을이 거의 침수되어 아랫마을과 건넛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새마을이나 외지로 이주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습이 급변하게 되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1973년 목계교(牧溪橋)의 가설이다. 이 다리의 건설로 마을 기금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던 목계나루가 폐쇄되었으며, 건설 인부로 왔던 많은 사람들이 내계에 있는 새 마을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또한 1980년 시작된 충주 다목적댐 공사도 목계 변화의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남한강에서 나오는 진오석이 물길을 따라 목계강 변에 많이 묻혀 있었는데 이 공사로 말미암아 물의 흐름이 적어져 강바닥이 드러나자 목계강 변에서 수석 채취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목계는 ‘수석의 고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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