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2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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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州 |
영어의미역 | Jungju |
이칭/별칭 | 충주,예성,대원,국원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이창훈 |
성격 | 고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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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헌 |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사자빈신사지석탑 |
[정의]
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개설]
고려시대 금석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에는 충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중주(中州)’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에는 중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민간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고, 따라서 중주라는 명칭은 중심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신라시대의 ‘중원(中原)’의 의미와도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려 태조에 의해 이름 붙여진 충주(忠州)도 ‘충성스러운 고을’과 함께 ‘충(忠)=중(中)+심(心)’, 즉 ‘국토의 중심(中心)’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신라나 고려가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국가 영역으로 하였으며, 백두대간과 한강의 자연지리적 상황을 고려할 때, 충주 지역이 중심 지역으로 인식되고 중요시되었음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명칭유래]
중주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확증하기 어렵다.
[관련기록]
충주를 가리키는 별칭으로서 중주가 표기된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 943년(태조 26)에 세운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에 “……임금의 불심(佛心)은 더욱 돈독해지고 스님을 자주 친견하려는 마음이 깊고 간절하여 가까운 곳인 중주(中州) 정토난야(淨土蘭若)에 주지(住持)토록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022년(현종 13)에 세운 사자빈신사지석탑에는 “불제자(佛弟子) 고려국(高麗國) 중주(中州) 월악산(月岳山) 사자빈신사(師子頻迅寺)의 동량(棟梁)은 삼가 받듭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 금석문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기 때문에 실제 고려시대에 중주라는 별칭이 사용되었음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사례 외에는 그 명칭의 흔적을 찾기 어려워 정확한 사용 시기나 연혁을 알기는 어렵다. 한편, 조선시대의 문집에도 중주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대부분 중국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