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0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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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尙絅 |
영어음역 | Jo Sanggyeong |
이칭/별칭 | 자장(子章),학당(鶴塘),경헌(景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택균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암행어사로 활약한 문신.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장(子章), 호는 학당(鶴塘). 증조할아버지는 풍안군(豊安君) 조흡(趙潝)이며, 아버지는 도정(都正)을 지낸 조도보(趙道輔)이다.
[활동사항]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2년 29세로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설서(設書)·정언(正言)·지평(持平)을 지냈다. 1717년(숙종 43) 35세에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나가 충주 등 충청도 지역의 민심을 지위 고하에 구애됨이 없이 공평무사하게 파악하고 조정에 보고하여 상벌을 엄히 하였다.
당시 청주목사 이징하(李徵夏)와 청양현감 신철(申撤)은 진휼(賑恤)을 잘하였다 하여 포상하고, 전 충청병사 유성추(柳星樞), 천안군수 최창연(崔昌演), 문의현령 이덕수(李德壽), 직산현감 김동익(金東翼) 등은 법을 어기고 다스리지 못하였다 하여 나문(拿問)하거나 파직하였다. 조상경은 충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의 암행 업무를 엄정하고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강직한 성품과 능력을 인정받아 훗날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게 되었다.
1721년(경종 1) 대사간·승지·이조참의로 승진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725년(영조 1) 풀려나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로 보임되었다. 이 때 병사들에게 조총을 훈련시켰으며,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탄핵되었다가, 1729년(영조 5) 다시 관직에 나아가 한성부좌윤·대사헌·경기관찰사·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31년(영조 7) 3월 동지부사로 임명되어 청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사조선열전(明史朝鮮列傳)』을 가지고 돌아왔다.
1734년(영조 10) 한성부판윤을 거쳐 병조판서에 이르러 군관의 치사(致死) 문제로 다시 파직되었다. 1736년(영조 12) 다시 기용되어 이조판서, 수어사(守禦使),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판돈녕부사,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으로, 노론의 중심 인물이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광암리 풍양조씨 선산에 있으며, 신도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헌(景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