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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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澔 |
영어음역 | Jeong Ho |
이칭/별칭 | 문경공(文敬公),장암(丈巖),중순(仲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상기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고조부는 좌의정 송강 정철(鄭澈)이고, 증조부는 강릉부사 정종명(鄭宗溟)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정직(鄭溭), 아버지는 청안현감 정경연(鄭慶演),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활동사항]
장암 정호는 병자호란을 피해 충주로 낙향한 정경연의 아들로 1648년(인조 26) 충주의 노은 고개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현손이고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수암 권상하와 함께 동문수학하였다. 1684년(숙종 10) 정시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대쪽 같고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늘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로 인해 소론, 남인 등 다른 당파와 정치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어 여러 번 귀양을 가기도 했다.
1718년(숙종 44)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725년(영조 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727년(영조 3)에 정치에서 물러났지만 당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1730년(영조 6)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731년(영조 7)에야 정치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이후 연풍과 충주 지역에 거주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1736년(영조 12) 10월 13일 태어난 곳에서 가까운 충주 누암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1737년(영조 13) 1월 8일 선산이 있는 지장리 화영산에 묻혔다.
[학문과 사상]
장암 정호는 부모로부터 청렴과 결백을, 스승인 우암 송시열로부터는 성실과 곧음을, 그리고 형제들로부터는 우애와 화합을 배웠다. 학문과 정치의 스승인 송시열에게서는 특히 예(禮)와 의(義)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 송시열은 정호에게 ‘동중서(董仲舒)’, ‘맹자(孟子)’, ‘정자(程子)’가 말한 다음 구절을 가장 즐겨 가르치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의리를 따르고 이(利)를 도모하지 않으며, 도를 밝히고 공(貢)을 생각하지 않는다(동중서)," "약간 지조를 굽혀 많은 공을 이루려는 것은 옳지 않다(맹자)," "제일의 의리를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된다(정자)." 장암 정호는 이를 통해 얻은 ‘성(誠)·직(直)·예(禮)·의(義)’의 네 가지 덕목 평생 실천하면서 살았다.
정호의 사상과 정치 철학은 1702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청론(淸論)을 주도하며 올린 상소에 잘 나타나 있다. 상소의 내용은 바른 정치를 위한 네 가지 대책으로 “의리를 밝힌다. 좋고 싫은 것을 분명히 한다. 시비를 분명히 가린다. 상벌을 삼간다”라는 항목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정호는 시와 문장에도 능해 많은 글을 남겼는데, 이는 1756년(영조 32) 손자인 정실에 의해 『장암집』으로 편찬되어 전해지고 있다. 『장암집』은 총 26권으로 시(詩), 소차(疏箚), 서(書), 경의문답(經義問答), 묘지명(墓誌銘), 행장(行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암집』을 바탕으로 1989년 경인문화사에서 『장암선생문집(丈巖先生文集)』 4권을 발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화영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69년(영조 45)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795년(정조 19) 우암 송시열, 노봉 민정중, 수암 권상하와 함께 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1796년(정조 20) 4월 숙종조의 청백리로 천거되었다. 1868년(고종 5) 누암서원이 훼철되어 그 건물 중 일부가 옮겨져 장암사당이 되었다. 매년 음력 10월 12일 향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