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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1017
한자 李耔
영어음역 Yi Ja
이칭/별칭 차야(次野),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문의(文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세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서울특별시
성별
생년 1480년(성종 11)연표보기
몰년 1533년(중종 28)연표보기
본관 한산(韓山)
대표관직 의정부우참찬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으로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이예견(李禮堅)이다.

[활동사항]

1480년(성종 11) 한성에서 태어난 이자(李耔)는 1501년(연산군 7)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504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하여 의성현령으로 부임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홍문관수찬, 홍문관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직했다. 1513년 복직하여 홍문관부교리, 홍문관부응교, 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1514년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과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승정원좌승지를 거쳐 1518년 대사헌에 올랐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병이 난 정사(正使) 남곤(南袞)을 지성으로 간호하여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남곤의 구명으로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하여 한성판윤,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을 역임했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숙청될 때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충주로 낙향하여 초야에 묻혀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1533년(중종 28)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학문과 사상]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사림 세력과 함께 도학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급진적 개혁 정책에는 반대하는 중도적 정치노선을 걸었다. 성격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 개혁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하였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평생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탐독하고 그 실천에 힘썼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음애일기(陰崖日記)』와 『음애집(陰崖集)』이 있다. 『음애일기』는 『음애일록(陰崖日錄)』 또는 『음애잡기(陰崖雜記)』라고도 하는데 1509년부터 1516년에 걸쳐 쓴 일기로 1권 1책의 필사본이다. 『음애집(陰崖集)』은 『음애선생집(陰崖先生集)』이라고도 하는데 1754년에 간행된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산 11-17번지 부아산 서쪽 기슭에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소 인근에 이자를 배향한 사당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사후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충주 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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