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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970
한자 柳壽垣
영어음역 Yu Suwon
이칭/별칭 남로(南老),농암(聾庵),농객(聾客)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충청북도 충주시
성별
생년 1694년(숙종 20)연표보기
몰년 1755년(영조 31)연표보기
본관 문화(文化)
대표관직 사헌부장령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庵)·농객(聾客).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유상재(柳尙載), 아버지는 통덕랑에 오른 유봉정(柳鳳庭),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아들로 유동휘(柳東暉)가 있다.

[활동사항]

1694년(숙종 20) 충주에서 태어난 유수원(柳壽垣)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성(현 서울)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급제하고, 1718년(숙종 44)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1722년(경종 2)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723년(경종 3) 조정의 쇄신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예안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파직되었다. 그나마 유수원의 가문이 소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다시 낭천현감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이 일찍 죽고 노론계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심한 정치적 규제를 받게 되었다. 이른바 임인안옥(壬寅按獄: 1722년 노론의 네 대신을 처형한 사건)의 주모자로 종숙부(아버지의 사촌 동생) 유봉휘(柳鳳輝)가 노론에 의하여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1728년(영조 4) 사헌부지평을 거친 이후 10여 년간을 줄곧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옮겨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 1737년(영조 13) 단양군수 재직 시 저술한 『우서(迂書)』를 보고 이광좌(李光佐), 이종성(李宗城), 조현명(趙顯命) 등이 유수원의 탁월한 식견과 재질을 인정하여 추천하였다. 마침 영조의 탕평책이 실시되어 비변사문랑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

뒤이어 사간원정언, 사헌부장령, 사복시정 등을 지냈으며 1741년(영조 17)에는 우의정 조현명의 추천으로 경연에 참가해 영조와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뒤 영조의 특명으로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에 종사하다가 1744년(영조 20) 은퇴하여 10여 년간 초야에서 지냈다.

그러나 1755년 2월 전라도 나주에서 있었던 괘서 사건(반역을 선동하는 익명의 벽보 사건)의 주모자들을 처형한 뒤 특별히 베푼 과거시험에서 응시생 심정연영조와 노론을 비판하는 내용의 답안지를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소론에 대한 숙청 작업이 진행되면서 1755년 5월 유수원도 모반죄로 체포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또한 당시 유수원의 출신지라는 이유로 충주목은 충주현으로 강등되었다.

[학문과 사상]

유수원(柳壽垣)은 당쟁의 여파로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나, 학문과 경륜이 뛰어났고,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등과 함께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 『우서』는 그 속에서 제시되었던 여러 개혁안 가운데서도 상공업 정책과 화폐 정책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여 시대를 앞선 경제 서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수원『우서』에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개편하고 전문화된 분업의 수행만이 조선이 이룩할 수 있는 부국안민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산업의 피폐를 과도한 농본사상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농업과 함께 상업도 균등하게 진흥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주전호제의 전면적 개혁보다는 수리의 확충, 농기구의 개선, 상업적 농업의 장려 등을 통해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농민 수입의 증대를 가져오게 하고, 호적 제도와 농촌 편제를 개혁하여 수취 제도를 공정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수원이 이처럼 다른 실학자와 달리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기간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비교 관찰을 통하여 현실적 모순과 폐해를 어느 누구보다 심각하게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1737년(영조 13)에 저술한 『우서』가 있다. 『우서』유수원이 모반죄로 사형을 당한 이후 저자 미상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본’, 등으로 세상에 유통되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유수원의 저작으로 밝혀졌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본’ 모두 1737년 이전의 초간본과 1744년~1750년의 보정본(補訂本) 두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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