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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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載顯 |
영어음역 | Gim Jaehyeon |
이칭/별칭 | 회백(晦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호일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회백(晦伯). 경주김씨 계림군파의 12대손이다. 조부는 종성부사를 지냈던 김원립(金元立)이고, 아버지는 정랑 김민교(金敏敎)이다.
[활동사항]
20세 전에 선원전 참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로 전임하였다. 같은 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사간, 장령·집의 등 주로 언론 계통의 관직을 거쳤으며, 1683년(숙종 9)에는 경상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흉년으로 삶이 어려운 백성들의 상황을 살피고 위로하는 데 진력하였다.
1689년(숙종 15)에 숙종의 후궁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의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정권에서 쫓겨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기사환국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좌승지였던 김재현은 송시열을 삭출하라는 전지(傳旨)를 실행치 않아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전 사직 오두인 등 86명과 함께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 사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국문을 당하였다.
1694년(숙종 20) 소론인 김춘택 등이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국문을 받게 되는 갑술환국을 계기로 남인들이 서인들을 완전히 축출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숙종은 장희빈의 행동을 싫어한데다 폐비에 대한 동정 여론까지 일어나자 오히려 민암을 사사하는 등 남인 세력을 축출하고 인현왕후의 복위를 결정함과 더불어 서인 세력을 다시 등용시켰다. 이후로 김재현은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한성부우윤·호조참판·도승지·공조참판·형조참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의 관직을 두루 거치게 되었다.
[묘소]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봉황리 내동에 있으며 묘역의 면적은 330.58㎡이다. 묘의 형태는 유돌분(乳突墳)이며 묘 앞에는 혼유석, 상석, 망주석, 문관석, 향로석 등을 세웠다. 묘에서 100m 우측에 있는 신도비는화강암의 석재에 아무런 조식이 없이 세워졌다. 1727년에 세워진 묘비의 전반부는 김재현의 벼슬길 본말에 대한 기술과 함께 특히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며, 후반부는 김재현의 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