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832 |
---|---|
한자 | 金允侯 |
영어음역 | Gim Yunh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규성 |
[정의]
고려 후기 충주산성 방호별감을 역임한 무신이자 승려.
[활동사항]
김윤후(金允侯)는 1232년(고종 19) 현 경기도 용인 근처에 있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로 있을 때 몽골병이 침입해 오자 처인성(處仁城)[현 용인]으로 피란하였다. 때마침 몽골군이 처인성을 포위 공격해 오자 처인성의 피란민들을 지휘하여 몽골군과 싸웠으며, 몽골 원수 살리타[撒禮塔]를 활로 쏘아 죽여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살리타를 사살한 인물이 김윤후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대하여 김윤후 본인이 부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윤후가 사살하였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윤후의 지휘 아래에 싸웠던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가 사살되었기 때문에 그 공이 지휘관인 김윤후에게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김윤후의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김윤후는 공을 타인에게 양보하여 말하길 “전투에서 나는 활과 화살을 갖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큰 상을 받으리오."하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뒤 섭랑장(攝郞將)으로 고쳐 임명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이후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대몽전쟁 기간에 큰 공을 세웠다.
1253년(고종 40)년 10월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있을 때 야굴이 이끈 몽골의 대군이 쳐들어 왔다. 김윤후는 7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몽골의 대군을 맞이하여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적을 물리쳤다. 김윤후는 식량이 떨어져 위태롭게 되자, “만일 힘을 다하여 싸우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할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하고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어서 관노의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평가하여 김윤후를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에 임명하였고, 그 밖에 전공을 세운 자들은 관노, 백정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작이 제수되었다. 조정에서는 충주산성 전투의 공로로 충주를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하였다.
1258년(고종 45) 김윤후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었고 1262년(원종 3) 추밀원부사와 예부상서를 역임하고 1263년 수사공겸우복야(守司空兼右僕射)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였다. 김윤후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하여는 자료가 부족하여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천민이 승려가 될 수 없었다는 점으로 보아 천민은 아니었을 것이며, 처인성에서 승리한 후 정부가 군의 최고위 상장군을 김윤후에게 제수하려 하였다는 점과, 부임하지는 못했지만 동북면병마사에 제수되고 수사공겸우복야에 이르렀던 점들을 미루어 보아 상당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전투할 때 보여준 지휘력이나 감투정신, 그리고 군민을 설득하고 관노들에게도 파격적인 대가를 제시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상당한 학식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윤후에 대하여는 『고려사(高麗史)』의 열전, 「고종세가」, 「원종세가」 등에 짧은 기사만 전할 뿐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