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830 |
---|---|
한자 | 金倫 |
영어음역 | Gim Ryun |
이칭/별칭 | 무기(無己),죽헌(竹軒),정렬(貞烈)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고려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무기(無己), 호는 죽헌(竹軒). 아버지는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김변(金賆)이며, 장인은 허공(許珙)이다.
[활동사항]
1290년(충렬왕 16)에 원의 반적(叛賊) 합단(哈丹)이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자 김륜의 가족들도 강화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김륜의 장인 허공(許珙)이 재상의 직무로 인해 함께 가지 못하게 되자 어린 김륜으로 하여금 가족을 이끌고 먼저 가게 하였다. 음보로 노부판관(鹵簿判官)이 되었다가 신호위호군(神虎衛護軍)을 거쳐 홍자번(洪子潘)의 천거로 변정도감부사(辨正都監副使)가 되었다.
감찰시승(監察侍丞)이 되어 내신(內臣)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5품랑(五品郞) 중의 한 사람을 전문(殿門)에서 구타한 일을 강력하게 탄핵하다가 1310년(충선왕 2) 9월에 주관(州官)으로 좌천되어 충주목사가 되었다. 당시 궁실과 불사(佛舍)를 수축함에 있어서 사자(使者)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징발하였으나 김륜이 사자를 제지하여 주민들이 편안히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충렬왕을 시종하고 원(元)에 갔을 때는 심왕고(瀋王暠)를 고려왕으로 세우려는 이들의 연판장에 서명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경상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합포(合浦)[현 경상남도 마산]를 진무하고 이민(吏民)을 편안하게 했으며 뒤에 첨의평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 삼사우사가 되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적(曺頔)의 난에 연루된 죄인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들은 조적에게 속았을 따름이니, 어찌 족히 책하리오”라 말하고 고문을 하지 않고 관용으로 다스려 죄인들이 감복하여 죄상을 숨김없이 자백하게 하였다.
원의 승상 백안(伯顔)이 반역자인 조적을 두둔하여 충혜왕을 소환하자 왕과 함께 원에 가서 간명하게 사리를 밝혀 왕에 대한 의혹을 풀게 하였으며, 그때 나이 육십을 넘겼으므로 원의 관리들로부터 백수재상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충혜왕이 원에서 돌아온 뒤 벽상일등공신 추성찬리공신언양군(壁上一等功臣 推誠贊理功臣彦陽君)에 봉해졌으며,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 토지, 노비가 하사되었다.
1343년에 충혜왕이 정동성(征東省)에서 원의 사신 고용보(高龍普)와 타치(朶赤) 등에게 변을 당하고 다시 원에 잡혀가자 왕을 구출하려고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원에 보내는 상소문을 쓰게 하였으나, 모든 대신들이 원 황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여 서명을 하지 않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찬성사로 승진되고 뒤에 좌정승에 올랐다.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부원군에 봉해지고 공신의 호에 보리(補理)가 더 가해졌다. 1348년에 강윤충(康允忠)의 죄상을 들어 탄핵하였으며, 그해 충혜왕의 시호를 청하러 원에 가려 하다가 풍질을 얻어 죽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렬(貞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