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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501
한자 大同法
영어의미역 Law of Uniform Land Tax
이칭/별칭 선혜법,대동수미법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625년연표보기
시행연도/일시 1651년연표보기
폐지연도/일시 1894년연표보기
시행처 선혜청

[정의]

조선 후기에 공납제(貢納制)를 폐지하고 대신해서 제정·실시한 재정제도.

[개설]

대동법은 조선 전기 조세제도 중 호역(戶役)으로 부담하였던 세납(稅納)을 토지세로 전환하는 제도이다. 즉 조선 전기 지방의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형태로 운영되던 공납제는 방납(防納)의 성행, 지주제의 확산, 공납제 부담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큰 폐단을 야기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의 공물(貢物)·진상(進上)과 지방의 관수(官需)·쇄마(刷馬: 지방에 공무를 위해 마련된 말) 등을 모두 토지세화하여 토지 1결에 쌀 12두를 징수하고, 이를 중앙과 지방의 각 관서에 배분하여 각 관청으로 하여금 연간 소요물품 및 역력(役力)을 민간으로부터 구입·사용하거나 고용·사역하게 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 처음 실시된 이후 1623년(인조 1) 강원도, 1651년(효종 2) 충청도, 1658년 전라도의 해읍(海邑), 1662년(현종 3) 전라도의 산군(山郡), 1666년 함경도, 1678년(숙종 4) 경상도, 1708년(숙종 34) 황해도의 순으로 100년 동안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1894년(고종 31)의 세제개혁 때 지세(地稅)로 통합되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시행되었다.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의 조세제도 중 부과기준이 모호하고 물품이 다양했던 공납제도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임진왜란 중 유성룡의 건의로 실시된 대공수미법의 편익을 체험한 한백겸(韓百謙)·이원익(李元翼) 등이 그 내용을 한층 보완하여, 광해군 즉위 초에 선혜(宣惠)의 법이라는 이름으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각종 공물·진상으로부터 마초(馬草)에 이르는 모든 경납물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치시켰을 뿐 아니라, 지방 관아의 온갖 경비까지 대동미에 포함시킨 데서 농민의 편익이 크게 도모된 제도였다. 그리하여 대동법은 농민의 열망 속에 1623년 강원도·충청도·전라도에도 확대·실시되었다.

그러나 실시되던 해와 그 이듬해에 걸쳤던 흉작과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행세칙의 미비, 이를 틈탄 지주·방납인들의 반대운동으로 인하여 1625년(인조 3)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전라 2도의 대동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른바 남방토적(南方土賊)을 비롯한 농민들의 저항이 날로 확산되고, 재정의 핍박이 호란(胡亂)으로 인하여 더욱 가중되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조익(趙翼)·김육(金堉) 등 대동법 실시론자들이 시행세칙을 새롭게 수정·보완하여 충청도에 다시금 실시하게 되었고, 뒤이어 성공적인 결과로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에 기준하는 대동법이 각 도별로 순조롭게 확대되어 갔다.

[내용]

대동법은 1차적으로 공물을 토지세화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전세를 부과하는 수조안(收租案)의 전결(田結)을 대상으로 쌀을 징수하였다. 다만 호역(戶役)을 면제하는 각종의 급복전(給復田)은 제외되었다. 그리하여 궁방전(宮房田)·영둔전(營屯田)·아문둔전(衙門屯田)·관둔전(官屯田)·학전(學田) 등에는 대동세가 부과되지 않았다.

충주에 실시된 대동법은 1결당 10두를 거두되, 춘추 각 5두씩 분납하게 하였다. 그러나 현종~영조에 걸쳐 6도의 대동세액(大同稅額)이 12두로 통일되면서 12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징수된 대동미는 크게 상납미(上納米)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상납미는 선혜청에서 일괄 수납하여 각 도와 군현에서 매년 상납하던 원공(元貢, 二十八司元貢物)·전공(田貢, 田稅條貢物)·별공(別貢, 別卜定貢物)·진상·방물(方物)·세폐(歲幣) 등의 구입비와 각종 잡세조(雜稅條) 공물·역가(役價)의 비용으로 지출하였다. 충주의 상납미는 『여지도서』에 5,761석 9두 5승을 정월과 2월 사이에 읍창과 가흥창에서 거두어 선혜청에 상납했다고 나와 있다.

유치미는 각 영(營)·읍(邑)에 보관하면서 그 영·읍의 관수(官需)·봉름(俸廩)·사객지공(使客支供)·쇄마·월과군기(月課軍器)·제수(祭需)·요역, 상납미의 운송, 향상(享上)의 의례(儀禮)를 존속시키는 뜻에서 설정된 약간의 종묘천신물(宗廟薦新物)과 진상물(進上物)의 상납 등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충주의 유치미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5,070석 2두로 나와 있다. 『호서대동사목』에 의하면, 충주는 공주·홍주·은산과 함께 대읍에 속해, 관수미 400석, 유청지가미 78석 10두, 감사지공미 10석, 사객지공미 100석 등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주와 함께 대로읍으로서 군료미 20석을 더 지급받았다. 이외에도 월과군기, 쇄마가 등 역시 대읍에 기준해 지급받았다. 이외에 충주에 속해있는 진선(津船) 3척의 보수 비용으로 4석, 개조(改造) 비용으로 13석을 지급받았다.

[변천]

대동법은 18세기 후반 상납미의 수요가 매년 증대되면서 당초의 성과를 잃게 되었다. 유치미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지방관들은 선혜청의 양해 아래 부족한 경비를 점차 농민에게 부담시켰고, 또 이를 기회로 갖가지 탐학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여기서 공납제 시절의 농민 부담에다가 대동세를 더하게 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될 정도로, 시행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납(貢納)이 대동법으로 개혁되면서 막대한 대동미를 받아들였고, 이 같은 운송물량의 증대는 운송업자의 활동을 자극하여 사선인(私船人)들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여건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대동미의 운송은 선운업자들의 활동을 촉진시켰다. 대동미는 전세보다 그 액수가 많았을 뿐 아니라 그 운송을 위해 정부가 특별히 운송체계를 마련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운송은 지토선(地土船) 또는 경강선(京江船)이 맡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전세곡(田稅穀)은 6도 269읍 중 136읍이, 대동미는 5도 245읍 중 113읍이 사선을 임차하여 운송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주로 조창 부근의 사람들을 조선의 뱃사람으로 고용하였고, 사선도 조창 주변의 사람들을 고용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 가흥창만으로는 대동미를 수송할 수 없어 가흥에서 가장 가깝고 배가 정박하기에 알맞고 제천과 원주·충주로 통하는 길목인 목계 일대에 배를 정박하게 되었고, 특히 사선이 이곳에 정박하여 상행위를 함으로서 1750년대에 내륙의 상항(商港)으로서 가흥이 크게 번창하였다. 충주는 가흥과 목계가 한강의 내륙항으로 번창하면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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