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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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哈丹-侵入 |
영어의미역 | Invasion of Hapd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택균 |
[정의]
1291년(충렬왕 17) 충주산성에서 고려군이 원의 반란 세력인 합단(哈丹)의 군대를 격퇴한 전투.
[역사적 배경]
1287년(충렬왕 13) 4월 원(元)에서 흥안령(興安嶺) 동쪽을 지배하던 내안(乃顔)이 사심을 품고 동방의 여러 왕들을 충동질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 세조(世祖)의 친정에 의하여 토벌되었다. 1288년 초에 내안의 잔여세력인 합단이 막북(漠北)에서 다시 반기를 들었는데, 원이 대대적으로 토벌을 단행하자 1290년(충렬왕 16) 토벌군에 쫓긴 합단의 무리는 고려의 동쪽 지역을 침입하였다.
[경과]
합단의 군사들은 쌍성(雙城)과 등주(登州)[지금의 안변]를 함락하고 철령(鐵嶺)을 넘어 원주(原州)의 치악성(雉岳城)[지금의 영원산성]을 공격했다가 대패하자, 이웃하여 있는 충주산성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1290년 4월 합단의 세력이 해양(海陽)[현 길주] 방면으로 진격하여 더 남하할 태세를 갖추자, 고려는 대장군 유비(柳庇)를 원으로 보내어 원병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아울러 고려 조정이 일시 강화도로 피난하고자 함을 원에 청하여 동의를 얻었다. 이에 우선 부녀자·노약자, 국사 및 보문각(寶文閣)·비서사(秘書寺, 훗날 흥교사)의 문적을 강화로 옮기고, 각 주현에 명하여 대비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 해 11월 원의 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합단의 군대는 쌍성을 침공하여, 12월에 쌍성과 등주를 함락하였다. 이에 조정은 강화로 들어가 난을 피하였다. 이듬해인 1291년 1월 합단의 군대가 철령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지금의 강원도]로 들어와 양근(陽根)을 함락하고 원주에 집결하여 치악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원주별초 소속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冲甲)이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로써 합단의 군대는 그 세가 크게 꺾이었다. 합단의 군대는 이어 충주를 공격하였으나, 충주산성 별감이 적을 크게 격파하고 4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결과]
1291년 5월 충주에서의 전투 이후 고려군과 원군(元軍)이 연합하여 공격하자 합단의 군대는 연기로 달아났다. 6월 충렬왕은 한희유(韓希愈)를 충청도로 보내 합단의 군대를 공격하여 580여 명의 항복을 받는 등 큰 전과를 올렸으며, 나유(羅裕)는 평양으로 달아나는 합단의 무리를 대파하였다. 이 전과에 힘입어 고려 조정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원주 치악성에서 대승을 거둔 데 이어 충주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합단 군의 세를 꺾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고려군은 승기를 잡고 여세를 몰아 합단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으며, 조정의 개경 환도도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