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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72
한자 蘂城
영어음역 Yeseong
이칭/별칭 충주(忠州),대원(大原),국원경(國原京)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이창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관련문헌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의]

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개설]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예성(蘂城)대원(大原)이 등장한다. 그 중 예성은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인데,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단체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명칭유래]

『고려사』에는 예성에 “1255년(고종 42)에 다인철소(多仁鐵所) 사람이 몽고 침략군을 방어함에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익안현(翼安縣)으로 승격시켰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하지만 다인철소의 승격과 예성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1254년(고종 41) 충주산성에서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후 충렬왕대에 국원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혹은 초석에 연화를 조각하였던 것에서 ‘예성’이란 호칭이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1978년 9월 2일 예성동호회에서 중앙의 태극 문양과 화려한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는 예성 심방석을 발견하여, 그 설을 뒷받침하는 유물로 간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원성이 고려 고종 때 승격된 국원경의 성곽을 의미하는 것인지, 충주산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고구려 이래 고려까지 같은 위치에 있었던 성곽인지, 아닌지, 또 그 위치가 어디인지 등 명확하지 못한 점이 많다. 게다가 관련 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형편이어서 향후 연구의 진전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형성 및 변천]

충주라는 명칭은 고려 940년(태조 23)에 처음 제정되었고, 983년(성종 2)에는 전국에 12목이 설치되면서 충주목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지방 행정구역의 개편과 함께 창화군(昌化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018년(현종 9) 전국에 8목이 설치될 때 다시 충주목이 되었다. 1254년에는 충주산성에서 김윤후의 활약에 힘입어 몽고군을 격퇴하였기 때문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었다가, 그 후 다시 충주목으로 환원되어 고려 말까지 지속되었다.

[관련기록]

『고려사』에서 예성에 관한 기록은 지리지의 충주목 기사 한 곳에서만 보인다. 그 내용도 “충주목은… 대원(大原)[성종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예성(蘂城)[고종 42년에 다인철소 사람이 몽고 침략군을 방어함에 공로가 있었다고 하여 익안현으로 승격시켰다]이라고도 부르며 …”라고 하여 별호임을 명기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주석에 언급된 고종 42년을 전후한 대몽항쟁 관련 내용은 『고려사』 세가(世家)에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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