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중앙공원에 있는 조선 전기의 누각. 1442년(세종 24) 경주에 있던 「태조 영정」이 충주의 동루에 잠시 봉안되었는데, 누각이 좁고 기울어져 충주목사 김중성(金仲誠)이 “오늘날 어용(御容)이 잠깐 멈추신 것은 참으로 이 고을이 만나기 어려운 영광이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어야 할 것이다”라며 경영루를 지었다....
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조선 전기 충주판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국형(國馨). 증조할아버지는 김자수(金子粹), 할아버지는 김근(金根), 아버지는 김영유(金永濡)이다. 중종대에 사화의 부당함을 주장한 명신 김세필(金世弼)이 아들이고 손자는 김저(金䃴)이다. 세조대에 첨정을 지냈고 1483년(성종 14) 충주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재임 중 관아의 노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죄로...
조선 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강화(江華). 증조할아버지는 최세창(崔世昌), 할아버지는 최복해(崔福海), 아버지는 최연년(崔延年)이다. 처는 유계손(柳季孫)의 딸이고, 형제로는 형 최순(崔淳)이 있다. 최린(崔潾)은 1478년(성종 9) 문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다. 예문관봉교, 주서, 사간원헌납을 거쳐 1503년(연산군 9) 충주목사로 부임하...
2004년 서예가 서동형이 충주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한시를 엮은 책. 충주에는 충주 출신의 위대한 유학자와 문인 및 예술가들이 충주에 관해 읊은 시가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충주에서 생활했던 감사나 목사의 시와 남북 교통의 요충지였던 충주를 거쳐 간 많은 문인 명사들이 읊은 시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은 개인 문집 등에 실려 있어 일반인들이 찾아보기란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