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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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奉省 |
영어공식명칭 | Naebong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 도읍하였던 마진과 태봉의 중앙 관부.
[개설]
904년 마진(摩震)을 건국한 궁예(弓裔)가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관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설치한 관부이다. 태봉(泰封)과 고려 초까지 이어지며 국정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관부로서 기능하였다. 고려의 상서성(尙書省)에 해당한다.
[설립 경위 및 목적]
895년 8월 철원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한 궁예는 896년 철원성을 거점으로 국가를 세우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국호를 비롯하여 관부 및 관직 체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궁예 초기 정권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궁예 정권의 국가적 면모는 마진의 건국 이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904년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武泰)로 정한 궁예는 광평성(廣評省) 외 18개의 관부를 설치하고, 수상인 광치나(匡治奈)를 비롯하여 다양한 관원들을 각 관부에 소속시켰다. 내봉성(內奉省)은 광평성 체제가 출범할 때 만들어진 관부들 중 하나이다.
내봉성의 성격과 기능은 『삼국사기(三國史記)』 편찬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려 중기의 도성(都省), 즉 상서성(尙書省)과 같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 상서성의 전신(前身)을 광평성으로 보는 이견이 수록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현재의 학계에서도 내봉성은 상서성으로 이어졌다고 이해한다. 내봉성이라는 관부명 안에 국왕의 명령을 받든다는 의미의 ‘내봉(內奉)’이 포함되었다는 데 착안하여 내봉성을 궁예의 측근 기구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즉, 내봉성은 정국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던 궁예의 의도 하에 설립되었다고 본다.
[조직 및 담당 직무]
내봉성의 장관은 내봉성령(內奉省令)이고, 차관은 내봉경(內奉卿)이다. 내봉성의 직무에 대한 설명은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내봉성이 주로 인사를 담당하는 기구였다고 보기도 하고, 국왕 측근에서 왕명을 받아 인사뿐 아니라 내부행정을 감독하는 일까지 맡았다고 보기도 한다.
[변천]
『삼국사기』에서는 마진의 광평성 체제를 소개하며 내봉성을 9번째로 거론하였던 반면 『고려사』에 수록된 태조(太祖) 즉위년인 918년 6월 관리 임명 기사에서는 광평시중(廣評侍中) 바로 다음으로 내봉령을 거론하였다. 거론된 순서를 관부의 위상과 연결시켜 본다면, 내봉성의 위상은 고려 건국 전후 격상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내봉성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 신라의 관부는 위화부(位和府)이다. 내봉성은 고려 성종(成宗) 시기인 982년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개편되었다가 995년에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변경되었다. 원간섭기 이후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병합되어 첨의부(僉議府)가 되었고, 삼사(三司)로 불리기도 하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인 1356년 상서성(尙書省)이 되었다. 1362년에는 다시 상서성을 폐지하고 삼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