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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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封官職 |
영어공식명칭 | Taebong Government Offic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
집필자 | 이재범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 도읍하였던 태봉에서 관리들의 상하 질서를 유지하고 직능의 한계를 정하기 위하여 실시한 국가 통치 체계.
[개설]
태봉의 관직은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관부에 소속된 관직이 있고, 별도의 품계 형식으로 구성된 품직이 있다. 태봉의 품직은 관계(官階)의 성격이 강하다. 마진에서는 관계가 두 차례에 걸쳐 시행된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즉, 궁예는 두 차례에 걸쳐 관리들의 서열을 정비하였던 것이다. 궁예가 시행한 관계는 마진 관제에서 보이고, 그 뒤 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뒤에는 다시 개정되어 고려 시대에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앙 및 지방 관직]
태봉의 관부에 소속된 관직은 체계적으로 전부 알려지지는 않았다. 단지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에 일부가 전하고 있을 뿐이다. 태봉의 관부는 상당히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소속 관직이 알려져 있는 관부는 최고 관부인 광평성이다. 광평성에는 광치나(匡治奈), 서사(徐事), 외서(外書)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광치나는 시중, 서사는 시랑, 외서는 원외랑에 해당한다는 설명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광평성 이하의 각 관부에는 시랑, 원외랑 등의 관직이 있었을 것이며, 그에 따른 정해진 관원들이 충원되었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태봉의 지방 관제는 주·군·현(州郡縣)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지 주·군·현이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기서의 주가 도(道)로 변하여 고려 지방관제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태봉의 지방 관직으로 확할 수 있는 경우는 왕륭·왕건 부자에게 수여한 태수(太守)와 성주(城主) 등이 있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 왕건을 송악성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성주라는 명칭은 호족들이 스스로 칭한 경우도 많아서 관직으로만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밖에 궁예는 패서(浿西) 지역에 13진(鎭)을 설치하였는데, 이 진의 운영에 따라 신라나 고려 시대와 같이 그에 준한 관직도 있었을 것이며, 일부에서는 그 우두머리를 대모달(大模達)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밖에 태봉의 지방 통치기구로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가 있었는데, 그 지역의 최고 관직은 시중(侍中)으로 왕건도 부임하였던 적이 있다. 왕건이 궁예를 축출한 이후에 고려에서도 계속하여 운영되었다.
다음으로 품직이라고 기록된 관계와 유사한 관직이 있다. 궁예가 제정한 관계[품직]은 모두 9단계이다. 각 등급의 명칭이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고 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과는 달리 골품제(骨品制)와는 명칭에서부터 크게 다르다. 신라 때의 관계인 골품제도는 관직과 신분을 동시에 규제한 17등급이었다. 반면, 궁예 정권의 관계는 관리들의 공적 질서 체계를 확립한 9단계였다.
마진과 태봉 관계의 공통점은 그 명칭이 관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904년에 제정된 관계는 정광(正匡)·원보(元甫)·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군윤(軍尹)·중윤(中尹)으로 체계화되어 있다. 이 시기의 관계에는 상(相)·윤(尹) 등이 나타난다. 911년 이후의 관계는 대재상(大宰相)·중부(重副)·태사훈(台司訓)·보좌상(輔佐相)·주서령(注書令)·광록승(光祿丞)·봉조판(奉朝判)·봉진위(奉進位)·좌진사(佐眞使)이다. 제1계인 대재상(大宰相)은 관제상의 최고위 관직인 재상(宰相) 등 관직과 유사한 명칭들이 보인다.
[관계의 특징]
궁예 정권에서 시행한 관계의 특징은 혈연에 기반을 둔 골품제도로부터 직능 기준의 관직을 기반으로 한 질서 체계로 전화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궁예 정권의 관계에서 보이는 형태상 가장 큰 특징은 두 번 모두 9등급이라는 점인데, 9등급 관계(官階)는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위(魏)에서 시행한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을 제도화한 것이다. 후삼국 시대도 위·진·남북조 시대와 유사하게 관리의 질서 체계를 일원화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었다. 즉, 궁예도 위(魏)를 참고하여 다양한 출신 성분의 인물들을 9등급으로 체계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궁예는 신라의 골품제도를 타파하는 대신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지배집단과 휘하 장수들을 새롭게 9등급의 관계로 편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결국 궁예는 골품제도 대신 관인화(官人化)를 목표로 하여 관계를 개혁하였다.
[변천]
궁예의 관계 개혁은 신라계 관리나 토착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일부 세력들의 반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를 축출하고 왕권을 장악한 왕건은 태봉 관직과 신라 골품제의 영향을 받은 관계를 동시에 사용하였는데, 이는 신라의 귀족과 호족세력을 무마하는 한편 궁예 시기의 관리들도 포섭하기 위한 조처였다. 왕건의 즉위로 태봉 관직은 일부가 사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멸되고 문산계와 무산계가 이를 대신하였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궁예는 철원을 도읍으로 하여 강력한 집권국가를 건국함으로써 철원을 신라의 변방 지역에서 한반도의 중심 지역으로 변모시켰다. 그리고 철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였으므로 철원은 한국사에서 국왕권을 기반으로 전국을 통치한 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뒤이어 고려가 한반도 중심 지역의 국가를 계승하여 송악군[개경]을 기반으로 475년의 역사를 이어갔으며, 다시 그 뒤를 이어 조선이 한양을 기반으로 5세기 이상 통일된 국가를 지속하였다. 철원의 정치 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변화를 초래한 국가 행정 체계의 시작이었다.
태봉 관직은 품계와 관직의 중간 단계로서 신라 골품제의 영향을 벗어나면서 새로운 관료화 사회로 지향하고자 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비록 궁예 당대에 사용되고 더 오랜 기간 존속하지 못하였지만, 그 영향은 왕건의 고려로 일부가 계승되어 고려 귀족사회 성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