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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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淨 |
영어음역 | Kim J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나경준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충신.
[개설]
조선시대 유학자이며, 문신(文臣)이다.
[가계]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며, 자(字)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이다. 1486년(성종 17) 정랑(正郞) 김효정(金孝貞)의 아들로 청주에서 출생하였다.
[관직]
10세에 사서(四書)에 능통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1507년(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하여 정언(正言) 등을 거쳐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조정에서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이 중심이 되어 장경왕후(章敬王后)를 중전(中殿)으로 영립(迎立)하였다. 이에 따라 담양부사(潭陽府使) 박상(朴祥)[1474~1530]과 함께 폐비신씨(廢妃愼氏)[중종 임금의 첫 부인, 연산군 중전의 친정 조카]로 반정공신들이 후환을 두려워하여 폐비시켰다.)의 복위(復位)를 상소하였으나 사론(邪論)이라 하여 보은(報恩)의 함림역(含林驛)에 유배되었다.
1516년에 풀려나와 응교(應敎)·전한(典翰)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부제학(副提學)에 발탁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과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형조판서로 폐차(陛次)되어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했다.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더불어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한 미신의 타파, 향촌의 상호부조(相互扶助)를 위한 향약(鄕約)의 적극적 시행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금산으로 귀양되었다가 다시 제주의 적소(適所)에 안치된 뒤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학문과 사상]
시문은 물론 그림에 능하여 새 짐승 등을 잘 그렸다.
[저술]
저서로 『충암집(冲菴集)』과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