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0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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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宋麟壽 |
영어음역 | Song Ins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미수(眉叟), 태수(台叟), 호는 규암(圭庵)이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송계사(宋繼祀)의 고손이며, 정랑 송순년(宋順年)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송여해(宋汝諧)이고, 아버지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송세량(宋世良)이다. 어머니는 유승양(柳承陽)의 딸이며, 부인은 권박(權博)의 딸이다.
[활동사항]
1521년(중종 16)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한 후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다가 2년 후 사가독서하였다. 홍문관 관원들과 함께 인사 행정의 공정한 실시를 내세워 김안로를 탄핵하였다. 이어 경연의 전경(典經)을 겸임하고, 왕의 특지로 충청도 지방을 순찰한 뒤 공물·잡역의 폐해를 보고하였다.
1525년 박사로 승진하고 이어서 부수찬·수찬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어 검토관(檢討官)으로서 경연에 참여했는데, 육조낭관 임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이어서 승정원동부승지와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특히 조정의 숭유정책을 받들어 영암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학술을 장려하였다. 이 때 남평현감(南平縣監) 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 백인걸(白仁傑) 등과 뜻이 맞아 학문을 토론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여 있던 중 49세 되던 해에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평생 학문을 좋아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학문과 사상]
진사(進士) 엄용공(嚴用恭)과 김안국(金安國)에게 지도를 받았다. 중종에서 명종(明宗)[1546~1566]에 이르는 시기 기호사림파의 핵심인물이다.
[저술]
『규암집(圭菴集)』이 있다.
[상훈과 추모]
선조(宣祖) 3년에 관작이 복위되고, 현종 1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충청북도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원군 문의의 노봉서원(魯峰書院), 전라북도 전주의 화산서원(花山書院),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